화제의 인물 탐험

이 뉴스를 공유하기





“미스터 코리안 훼스티발”이라는 별명을 지닌’김진형’한국의 날 축제재단 명예회장(73)은 요즈음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으며 무척 흐믓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날 축제가 성공적으로 끝난 이유도 있지만 지난 달 본국의 한서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서대학측은 지난 달 25일 미주지역에서 한인들의 위상 제고를 위해 노력해온 노고와 함께 한.미 양국 문화에 기여한 사회적 공헌도와  한서대 학생들의 미국내 연수 프로그램 지원 등 그동안 김 회장이 보여온 업적을 인정해 명예 행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그는 “지난 날에 대한 나의 활동을 한국에서 인정받았다는 점에 감사한다”고 학위 소감을 나타냈다.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김 회장은 1972년에 코리아타운 교민회를 창설하고 2년 뒤인 1974년에는 한국의 날 축제 퍼레이드를 주도하는 등 30여 년간 한인사회 발전에 앞장 선 ‘코리아타운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또 그는 지난 93년부터 동양계로는 최초로 LA시 경찰국 커미셔너에 임명됐으며, LA카운티 노인복지위원회의 커미셔너로 10여 년간 활동했다. 그의 활동을 소개한다.


















한미 양국문화에 기여한 공헌도 인정


지난달 25일 한서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답사에서 김 회장은 “오늘날 코리아타운은 이제 대한민국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인의 문화와 정서가 살아 숨쉬는 곳”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LA의 코리아타운은 우리 국위를 선양하는 상징물이 되었으며, 해외 동포사회로는 가장 큰 규모인 백만 인구를 자랑하는 커뮤니티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제가 창시한 코리안 퍼레이드와 함께 4일 동안 펼치는 한국의 날 축제는 연인원 30만 명이 동원되는 해외동포사회에서는 가장 큰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면서 “이것은 과연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국제사회에서 한국인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성공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그에게 있어 코리아타운은 어머니의 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1년은 ‘한국의 날 축제’로 시작하고 끝나는 생활일 정도로 그의 활동은 ‘코리안 훼스티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도 그의 화제는 ‘한국의 날 축제’를 벗어 날 수가 없다. 그의 미국생활 40여 년은 코리아타운에서 시작되어, 코리아타운에서 아직도 무언가를 찾고 있다. “내년 한국의 날은 무엇으로 새롭게 선을 보일까?”를 생각하고 있다.
이번에 명예행정학 박사를 받은 김 회장은 1964년 도미해 1968년부터 LA에 정착했다. 6.25 당시 용산고를 거쳐 서울문리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는 페퍼다인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1년간 수료했다. 그가 LA에 정착할 당시에는 한인동포수가 1만 여명 정도였다. LA에 살면서 먼저 온 중국인들의’차이나타운’과 일본인들의’리틀 도교’를 보고 나서 “우리도 우리의 마을이 있었으면….”하면서 자연히 한인들의’코리아타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당시 한인들은 USC인근인 제퍼슨 불러버드에 조그만 상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65년 새이민법 제정 이후 이민자들 대거 LA에
슬럼화 올림픽가 중심으로 코리아 타운 설립 박차


1965년에 제정된 새 이민법에 의해 가족이민이 열리자 한인들의 “제2의 이민물결”이 시작되면서 올림픽 불러버드를 중심으로 웨스턴 애비뉴와 버몬트 애비뉴에 상점들을 잇달아 열기 시작했다. 이 지역이 당시 슬럼가에 속해 있어 렌트비나 땅값이 싸기 때문이었다.
서울문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결과로 자연 문학에 관심을 두어왔던 그는 올림픽 불러버드에 책방을 열었다. 문화의 불모지에 서점을 열었다는 자체가 신선했다. 지금은 대형서점이 여러 개 들어선 코리아타운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우선 동포의 수가 너무나 적었다. 그는 올림픽 불러버드에 자리잡은 수군데 한인업소를 대상으로 ‘한글간판 달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의 특기인 서예솜씨를 살려 직접 페이트통과 사다리를 차에 싣고 다니며 한인상점에 무료로 한글간판을 써주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인 상점에도 찾아가 “한글간판을 달면 한인고객이 들어오게 된다”면서 권유해 허락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하기를 3개월 동안에 62개 업소에 한글간판이 올라갔다.
영어간판만 있던 거리에 띄엄띄엄 한글간판이 부착되어 자연히 한 울타리가 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동포들도 올림픽 불러버드에 가면 한인상가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코리아타운’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였다.  
한글간판을 써주었던 김 회장은 올림픽 불러버드에 한인들이 많이 다녀갈 수 있는 아이디어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라티노계나 중국계 그리고 일본계들이 연중 그들의 타운에서 패스티벌을 개최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전통축제를 열어보자”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코리안 퍼레이드 개최 제의에 모두 난색?미주 한국일보 주관처 승낙
74년 11월3일 제1회 퍼레이드에 무려 3만 여명 몰리는 쾌거 이룩













그는 코리아타운번영회를 대신하여 한인 언론사들을 찾아가 ‘코리안 퍼레이드’를 개최하자고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언론사들은 모두 난색을 표명했다. 우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고 ‘코리안 퍼레이드’를 보러 얼마나 관중들이 나올까도 문제였다. 김 회장은 ‘타운 번영회’단독으로 라도 축제를 개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 회장은 사재 5,000달러를 내놓았다. 당시의 이 돈은 조그만 집을 살 정도였다. 노래자랑과 사생대회 그리고 학술발표회 등을 하기로 정했다. 문제는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코리안 퍼레이드’를 개최하는 일이 남았다.난색을 표명했던 언론사들 중에서 한국일보가 주관처로 승락 하기에 이르렀다.
1974년 11월 3일 올림픽 불러버드에 제1회 ‘코리아 퍼레이드’가 팡파르를 울리며 행진을 벌였다.
김 회장은 물론 행사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 연도에 무려 3만 여명의 한인들(한국일보 보도)이 몰려 나왔다. 당시 예상보다 엄청나게 많이 나온 한인들을 보고 대회 관계자들은 “한인들이 이렇게 많을 줄을 몰랐다”며 놀랐다고 한다. 성공적인 퍼레이드를 보면서 김 회장은 ‘코리아타운’의 건설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실지로 올림픽 불러버드에 한인상가들이 급속히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한글간판이 많이달린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LA시의회는 정식으로 ‘코리아타운'(Korea Town)이라는 공식적인 행정구역으로 선포하기에 올림픽 불러버드  프리웨이에’코리아타운’이라는 표지판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80년 올림픽 프리웨이에 ‘코리아 타운’ 표지판 건립
시 당국도 LA역사상 최초로 한인타운 파출소 설치 개가


한인들의 해외 진출 이민역사에서 해외에’코리아타운’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는 처음이었다.
코리아타운이 발전되면서 인구의 유입도 늘어나고 왕래도 많아져 자연히 범죄도 발생하기 시작해 상가보호 차원에서 김 회장은 당시 톰 블래들리 LA시장에게 파출소 건립을 건의하였으며, 한인 커뮤니티의 요청에 의해 시당국이 LA역사상 최초로 한인커뮤니티를 위한 ‘코리아타운 파출소’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일이 물론 김 회장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래를 보며 타운을 건설하겠다 는 꿈을 지니고 솔선했다는 점에서 “코리아타운의 개척자”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의 코리아타운의 번영은 김 회장을 포함해 희생적인 봉사로 일관한 많은 ‘올드타이머’들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김 회장은 LA경찰 커미셔너 직에서 은퇴했다.
지난 1993년 처음으로 동양계 커미셔너에 임명 된지 13년간 봉직했다. LA시 커미셔너로  최장수 커미셔너를 지낸 셈이다. 7명으로 구성된 LAPD 경찰허가 커미션은 유흥업소, 노래방 등 각종 범죄와 연관되기 쉬운 업종의 허가를 담당하는 기관이다. 또 이들 업소가 규정을 위반했을 경우 영업정지허가취소 등의 처분도 내리게 된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비영리단체의 면세혜택 심사가 추가되는 등 기능이 강화됐다.
이처럼 각종 비즈니스의 ‘생사’와 직결되어 있다 보니 이해가 얽힌 당사자들의 오해로 그 동안 적지 않게 마음고생도 심했다고 김 회장은 술회했다. 특히 업소의 허가 여부에 따라 업주들의 생계가 달린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지난 93년 리차드 리오단 시장에 의해 임명돼 4차례나 유임하면서 3명의 LA시장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후임 커미셔너에 한인 길옥빈 변호사가 임명돼 기대감이 크다면서 “또 한인이 임명돼 타 아시안 커뮤니티에서는 시샘을 하겠지만 비아라이고사 시장이 그만큼 한인사회를 중시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재임 기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인들의 준법정신. 신규허가 문제 등을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다가도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깨끗이 승복한다는 것이다. 반면 ‘팔을 안으로 굽는다’고 매춘. 상표도용.유흥업소 불법영업 등으로 출두하는 한인들을 보면 그렇게 부끄럽고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지난 2002년에 ‘우리, 한국인에게’라는 책을 펴냈다. 미국에 살면서 느낀 점과 경찰 커미셔너로 활동하면서 체험한 미국생활을 소개한 자전적 책이다. 책이 발간되자 한국의 서점가에서는 “미국이민의 길잡이” 도서로 평가했다. 그는 1984년에도 ‘서석 수상록’을 펴냈다.
서예에 남다른 면을 보이고 있는 그는 수석에도 남 다른 일가견이 있어 미국 과 한국에서 수 차례 전시회를 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진형 명예박사 주요경력


1962-64:      국제관광공사 총재비서
1972:         LA 코리아타운 교민회 창설 초대회장(현재 명예회장)
1974:         LA코리아타운 ‘한국의 날 ‘축제 퍼레이드 창시(현재 명예대회장)
1982:   청계 서예 개인전
1984-1990: LA-부산 자매도시 위원
1991년-현재   칼슨시 국제자매도시 위원
1992-93: 미주서예가협회 회장(현재 고문)
1993-2006:  LA시 경찰국 허가심사위원회 커미셔너
1993-현재: LA카운티정부 노인복지 커미셔너
2001-현재: GEK, Inc. 대표이사
2003-현재: 은진장학회 창설 이사장
2003:   제30회 ‘한국의 날’ 퍼레이드 명예그랜드마샬
2006:    한서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