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김일성 논란에 새 주장 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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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김일성’ 논란이 또 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최근 미국 의회도서관은 해방 직후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했던 고려인 81인의 육필 수기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제작했다. 이 수기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북한군 대좌 출신의 유성철 전 작전국장이 있다. 유성철은 이 수기집에서 6.25 전쟁이 어떻게 해서 발발하게 됐는지 비화를 공개했다. 또 북한 김일성 주석이 일제 당시 전설적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인 김일성 장군과 동일인이 아닌, ’가짜 김일성‘이라고 폭로했다. 이 주장은 사실일까.


지금까지 국내 학계와 언론 등에서 ‘김일성 가짜설’은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생존시는 물론 사후에도 ‘가짜 김일성’에 대한 논란은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미의회 도서관이 제작한 ‘숙청된 고려인 가족 81인의 육필수기’에서도 ‘가짜 김일성’ 주장이 제기됐다.
그런데 이 주장이 무게감을 던지는 것은 폭로 당사자가 일제 당시 항일빨치산 운동을 벌였던 김일성장군과 함께 활동했으며, 북한 정권 초기 군 고위간부를 지낸 인물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유성철 전 작전국장이 밝힌 ‘피바다의 비화’ 중 6.25 전쟁 발단 배경과 ‘가짜 김일성’ 주장은 이렇다.
“1950년 3월 김일성은 스탈린을 방문… 6.25전쟁 작전 계획은 민족보위성 작전국의 한 방에서 약 1개월간 극비리에 작성되었는 바…소련 고문단 와실리예프 중장, 포스트니코프 소장 등이 주도적으로 역할을 했다.
나는(유성철 작전국장) 러시아어로 된 작전계획을 번역하여 강건 참모장에게 주었다. 이 계획은 곧바로 실천에 옮겨졌다.”
유성철은 또 일제 말기 소련군이 조직한 88특별 저격여단에서 김일성과 함께 활동한 시기를 언급하며 ‘진짜 김일성 장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37년 보천보 지서를 습격한 항일 유격대는 진짜 김일성 장군이 지휘했다. 하지만 그는 습격 후 추격해온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유성철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 개선 행사 장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김일성이 연단에 올랐다. 그러자 ‘만세!’ 외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런데 그는 33세의 청춘이었다. 진짜 김일성은 50 성상의 노장군이시었다.”
유성철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33세의 젊은 김일성은 노장군 김일성의 유명세를 이용한 것이 된다.
당시 북한 주민들의 뇌리에 각인된 김일성 장군은 보천보 전투의 전설적 영웅으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아는 주민들은 없었다. 이를 간파한 가짜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으로 둔갑했다는 얘기다.
반면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북한 정권 수립 초기, 참여했던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거의가 중국공산당 및 소련 공산당과 관련을 맺고 항일 투쟁을 벌였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김일성의 출신 성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33세의 김일성이 가짜라면 최건 김책 등 기라성 같은 항일













 


유격대출신들이 가짜 김일성을 인정하고 따랐을까.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들은 ‘김일성 가짜설’을 증명하는 객관적 기록물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신문기사이다.
1937년 11월 18일자 경성일보 조간 7면에는 김일성과 관련된 기사 한토막이 보도되었다.
“공산 비적 김일성이 사망, 조만 국경지대 주민들이 이제 근심을 덜었다” 그렇다면 경성일보 기사는 진실일까.
‘김일성 가짜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1937년 발생한 보천보 전투와 이를 지휘했던 김일성장군의 활동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뉴스포스트>의 취재 결과,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보천보 전투와 관련해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하는 측과 ‘진짜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해석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먼저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전하는 보천보 전투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937년 6월 2일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소속 제6師부대원 약 1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보천보를 습격했다. 당시 보천보는 한인 280여 호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 도합 3백여 호의 면사무소 소재지이며 주재소와 소방서 보통학교가 있는 비교적 큰 부락이었. 이들은 30분 가량 집중 사격을 가한 후에 주재소 무기고를 부수고 경기관총 1정 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1170발을 탈취했다. 이어 소방서를 약탈하고 면사무소 학교를 방화하고 시가지에 들어가 주택과 상점 병원 등을 털어 현금과 물자 의료기기와 약품 곡물과 의류를 닥치는대로 약탈하고 기습 한 시간 후에 철수했다.
제6사부대가 항일전투부대라면 일본의 관서나 경찰서 군부대를 상대로 작전해야 당연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일본인이 피해를 본 것은 주재소 순사 1명이 부상당하고 주재소에 잠자던 일본 순사의 2세된 딸이 유탄에 맞아 죽고 일본인 음식점 주인이 총에 맞아 죽은 것 외에는 피해자가 전부 우리 한인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작전 목적은 물자 약탈이지 항일 전투가 아니었다.
보천보사건과 그후 계속된 약탈 사건으로 혜산경찰서는 비상경비태세에 들어간다.  김일성과 내통하는 국내인사들을 색출하는 한편, 각종 공산당 조직에 관련된 인물 5백여명을 체포하는데 이것을 혜산사건이라고 한다. 혜산사건 피의자들의 심문조서에는 국경지대를 소란케하던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 나이는 36세(1901년생)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 함경남도 태생으로 되어 있다.













이 사람은 절대로 북한의 김일성과 동일 인물이 아니다.
보천보 사건 5개월 후 김일성은 만주의 밀영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부하 8명과 함께 전사했다. 쓰러진 김일성의 시체는 항일연군측이 회수하지 못했고, 인근 주민들의 그의 얼굴을 보고 김일성이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가짜 김일성’ 주장하는 이들은 이때 진짜 김일성이 분명 죽었으며 북한의 김일성주석은 ‘제갈공명의 주검’을 이용하듯 둔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일례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활동 내역부터가 다르다. 그 주장은 이렇다
“김일성이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1937년 보천보 전투다. 보천보와 불과 20km 떨어진 곳에 혜산진이 있다. 김일성부대는 현지 공작원득과 연계해 치밀한 사전 준비를 한 뒤 6월 4일 압록강을 건너가 마을 점령했다. 주재소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한 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항일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연설하는 등 24시간을 점령한 뒤 삐라를 뿌리고 철수했다. 혜산진에서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해 뒤를 쫓았으나 오히려 사상자를 내고 도망쳤다. 만주의 항일세력이 조선 땅에 쳐들어와 잠시나마 마을을 점령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김일성의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됐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일본군의 제1 표적이 됐는데 그의 목에 현상금 1만엔이 걸렸다. 이후에도 김일성부대는 만주 지역 일대에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1940년에는 김일성부대를 쫓던 일본군의 마에다 중대를 치열한 교전 끝에 섬멸해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렇듯 보천보 전투의 해석에도 시각이 판이하다.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만 해도 ‘독재자’ ‘민족 중흥을 이룬 탁월한 지도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 입장에서는 극악무도한 테러범이지만, 이슬람권에서는 영웅이다.  김일성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 아닌, 가짜라는 주장은 1945년 10월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김일성장군 환영대회에 나타난 김일성이 33세로 너무 젊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두 사람의 현격한 나이 차이로 미루어 둘은 결코 동일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혜성같이 나타난 젊은 김일성과 노장군 김일성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 것일까.
이와 관련,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 교수의 회고록에서 어느 정도 단초가 발견된다. 와다 하루키는 회고록에서 한 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에는 김일성이 등장한다. 사진 속의 김일성은 훗날 북한 김일성 주석의 모습 그대로다. 이 사진과 함께 김일성과 항일 빨치산 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의 면담을 토대로 와다 하루키 교수는 ‘김일성 가짜설’이 ‘가짜’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남는다.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이 어떻게 김일성장군의 이름을 이어받게 됐을까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 일부 의식 있는 김일성 연구 전문가들은 김일성이 김일성장군의 ‘가케무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김일성 장군의 사망후 사기 위축을 우려한 항일빨치산 조직 내에서 김일성 장군의 대역을 맡을 사람을 찾았고, 그 역할을 젊은 김일성이 맡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역사에도 비근한 사례가 있다. 전국시대 일본의 실력자 다께다 역을 맡았던 가케무사가 바로 예다. 가케무사는 오랜 세월 죽은 다케다 역할을 해오다 자신이 진짜 다케다로 착각해 비극적 말로를 맞았다. 그러나 김일성은 한때의 가케무사 시절을 넘어 북한을 통치하는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이 진 (언론인)
<뉴스포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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