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스토리] 연상의 여인 살해한 용의자 강호춘 애끓는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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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부터 사귀던 연상의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며칠동안 시신을 차에 싣고 다닌 남자가 뒤늦게 경찰에 체포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남자는 썩기 시작한 여자친구의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병원 측의 신고로 덜미를 붙잡혔다. (본지 6월14일자 693호 보도).
체포된 용의자 강호춘(사진·미국명 HoChun Kang·40)씨는 사건 발생 1개월 전 <선데이저널>을 방문해 취재기자에게 자신의 심경을 호소하며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택했던 잘못된 만남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했다.
용의자 강씨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지인에게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며 자살을 염두에 두고 사건 발생 수 일전 장문의 이 메일을 보내 비극적인 사건을 암시했다. 서로 가정을 갖고 어린 자녀까지 뒀던 불륜의 연인은 결국 파멸을 맞고 말았다.
사랑과 돈에 얽힌 미움이 넘쳐 남자는 살인범이 되었고 여자는 싸늘한 시신이 되는 충격적이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본지가 입수한 용의자 강씨의 편지에는 두 사람의 만남에서부터 사건 직전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충격적인 편지 내용을 <선데이저널>이 단독 공개한다. 다만 실명으로 거론된 인물은 가명으로 처리했으며 문제의 소지가 있는 내용은 일부 삭제했다.
                                                                                                  <편집자 주>



안녕하세요! 저는 강호춘이라고 합니다. 
40년 세상을 살면서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없고 이토록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적도 없습니다. 이런 편지를 보낸다는 것에 정말 많은 생각과 혼란을 느끼지만 몸으로 알지 못한다면 결코 깨달을 수도 없다는 생각과 아직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도록 부득이 사연을 알리고 싶습니다.
2004년 2월에 처음 그 사람(Caroline Kim)을 만났습니다. 서로 가정이 있는 상황에서 만나서는 안 될 두 사람이 우연한 인연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만난지 불과 2번 만에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일로 인해 결국 그녀를 만난지 1년도 지나지 않아 가정불화가 생겼고 얼마 뒤인 2005년 6월 이혼을 하게 됐습니다. 어쩌면 저도 그 사람을 만나면서 어린 아들과 아내를 스스로 내몰았는지 모른답니다.
이 같은 죄로 겨우 2살짜리 어린 아들을 혼자서 키우며 그 사람을 더욱 긴밀히 만나왔고 그 사람은 남편이 있는 집에서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나의 도움으로 교육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는 분은 교회에 여러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와 같은 감정이 아니었나봅니다. 처음 나에게 했던 말과는 다른 내용이 많았으며 자신도 오래전부터 남편과 각 방을 쓰고 있으므로 곧 이혼을 할 것이라며 늘 말해와 전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저 역시 상황이 불가피하게 되었지만 혼자서 아들을 키우는데 별 지장 없이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그 사람은 R한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녀는 R아카데미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음악교사이기도 합니다. 온순한 성격이지만 똑똑하고 영리하며 시대에 앞서가는 그런 여자였기에 저 역시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짧은 시간에 사랑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철저하게 관리하며 특히 두 자녀를 위해서는 관심과 사랑이 칠 정도로 유별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그녀는 교회 행사가 있을때마다 앞에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워낙 자기관리에 철저해 가급적이면 흠 잡히는 행동은 교모하게 피해가는 똑똑한 여자였지요.
이런 여자였기에 제 친 형과 형수도 처음 그런 여자를 홀렸다며 저를 숱하게 나무라고 질타했었습니다. 제 말보다 그 여자 말을 믿은 탓이었겠죠. 이번 사건에서 역시 검찰이나 경찰에서 비록 피해자이고 여자이기에 그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결국 그 사람의 뛰어난 언변과 인상 때문이라는 사실을 저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녀를 위해서 정말 많은 일들을 해왔습니다. 교육사업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단 한번도 한국을 나가지 않고 많은 한국 학생들을 이곳에 유치해 영어캠프를 진행하였으며 특히 교육사업을 위해 한국으로 주고받은 이메일이 무려 10,000개가 넘습니다. 무려 수년이란 시간을 같이 보내고 남편 이상 그 무엇도 다해주며 그렇게 지내온 것입니다.
특히 2006년도엔 제주도 학생들을 샌프란시스코에 유치를 하였으며 2007년 여름에는 더욱 많은 학생들을 UCLA 영어캠프에 참여하는 결과로 그 사람에게 많은 돈을 한순간에 벌게 해주었습니다. 저 역시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이 시작한 정수기 사업에서 제법 많은 돈을 단시간에 벌게 되었고 우리 두 사람의 생활은 부러울 게 없는 상류수준까지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유달리 저의 아들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일로 싸우면 문제가 커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번도 저의 아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오르지 자신의 아이들만 챙기기에 급했고 저의 아들은 쉬는 날도 없이 그녀의 교육사업과 저의 비즈니스로 인해 뛰어다니는 아버지 탓에 언제나 남의 손에서만, 휴일에는 거의 남의 손에서만 자랐습니다.




자녀양육·돈 문제로 불화


저는 일찍부터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녀 역시 당시엔 저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기에 언제나 조용히 함구하며 그렇게 지냈습니다. 특히 그녀는 나를 다른 여자와 말 한마디 못하게 하였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질투심이 강했습니다.
심지어 같이 일하는 여직원조차도 남자로 바꾸라며 난리를 치던 그런 여자였지요. 사랑이든 집착이든 그 당시엔 저를 좋아하니까 그러겠거니 생각을 하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번 돈으로 집을 사자며 저에게 요청을 해왔고 저는 조만간 우리가 결혼해 살 집이니 적당한 금액의 집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연락이 와서 로마린다에 분양하던 KB 타운 홈을 보게 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이 큰 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며 친구들을 자주 불러서 놀게 해주고 싶다며 더욱 큰집을 사야한다며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반대를 했고 더 큰집은 무리라 안 된다고 했더니 그녀는 울면서 저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결국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그런 여자인 것이지요! 저는 알아서 하라며 허락을 했고 얼마 뒤 2007년 11월 지금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을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엔 그녀의 가족조차도 반대를 많이 했었지만 그녀를 설득하고 이기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집 명의도 당시엔 그녀의 신용상태가 좋았고 돈과 관계된 것은 간섭하면 싸움이 나기에 뭐든지 그녀가 독자적으로 진행했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돈만 주면 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125만 달러라는 돈이 적은 돈이 아니었으나 그녀는 결국 레들랜드에 있는 큰집을 계약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새로 분양하는 집이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는 것은 더욱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추가로 들어간 비용이 무려 내부에만 35만 달러나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BMW 7 시리즈 및 동수의 X5를 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인피니티 G37, 딸의 농구시합 때와 집안, 그리고 학원에 쓴다며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와 서버밴 그 뒤 딸의 BMW 3시리즈 등을 미친 듯이 사들였습니다. 그야말로 돈을 물 쓰듯이 쓰기 시작한 겁니다.
자신을 꾸미기위해 명품으로 모든 옷과 신발을 사는 것은 일상이었습니다. 사람이 변하기 시작했으며 때는 이미 늦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이에서 상대방이 원하고 좋아한다면 남자로서 당연히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뭔가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집을 구입하고 이사를 하던 12월에 있었습니다.


앞뒤 가리지 않는 분별력에 언쟁


저에게는 집을 사서 그때 이혼을 하고 나올거라고 했으나 우연찮게 그녀의 가족들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된 것입니다. 자신의 남편에게 이사를 같이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거절을 하니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시동생에게 형을 설득하여 이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때는 멍한 상태였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아이들만 데리고 이사를 하면 자신의 교인들이 자신이 이혼을 한 것으로 알기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그런다는 말을 하더군요.
저는 예전에 그녀와 같이 R대학의 구내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 사람의 남편이 마침 식사를 하러 온 적이 있었으며 공교롭게도 세 명이서 한 테이블에 않아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잠시였지만 저도 죽을 지경이었고 그 사람도 인상이 말이 아니더군요. 하지만 남편은 남자인 제가 보기에도 정말 보기 드문 그런 좋은 분이라는 것을 한눈에 느꼈습니다. 그때 이미 남편께서는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통씩 전화를 주고받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가 LA로 나오니 누군들 모르겠습니까. 아마도 그분이야말로 알면서 아이들 때문에 참고 그녀를 마음에서 지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근데 그녀는 저에게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신이 약속을 어기게 되었고 다행히 남편께서는 이사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저는 이사를 했으니 당장 이혼하라고 했습니다.
딸이 대학을 들어가면 그때 하는 게 좋겠다더군요. 하지만 그 당시엔 그녀의 부모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기가 막힌 말을 듣게 되었지요. 좀더 정확히 풀이하면 바로 이혼하고 낮선 남자와 산다는 말을 듣고 다닐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진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이 틀린 것은 그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친구들을 집 근처에서 만나거나 혹은 여러 친구들이 어디를 가게 되면 서슴없이 그녀는 자신의 BMW7시리즈와 캐딜락에스컬레이드를 스스럼없이 타고가라며 버릇을 잘못들이고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한 마디하면 “네 새끼도 아니면서 그런 것까지 간섭하냐”며 눈빛이 갑자기 달라지고 금방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진정 아이들이 잘되기를 원한다면 그런 행동 자체가 아이들을 잘못 키운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아이들에게 더욱 기를 세워주기 위해 노력하는 여자였습니다.



불경기로 촉발된 돈 문제가 감정으로


그녀의 폭언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너는 영어를 못하니 내가 경찰에 신고하면 넌 징역간다” “미국 온 지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 영주권도 없느냐” “네가 그 모양이니까 네 와이프가 아들을 두고 떠났지”라며 저를 윽박질렀습니다.
저는 미국에 2003년 9월에 왔으며 체육인 비자인 P-1으로 들어왔습니다. 그전에는 일본에 제법 오래 있었죠. 그리고 미국에 와서는 형님회사에서 잠시 있다가 모 방송국에 다녔으며 그곳에서 영주권 스폰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그때는 그녀도 영주권자였으며 그녀는 지난 2007년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와는 그녀가 저에게 사준 두장의 티셔츠 때문에 이혼을 하게된 것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환율이 오르면서 한국에서 오기로 했던 학생들의 영어캠프가 중단되고 또 경기침체로 인하여 저의 사업도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기울자 싸움은 더욱 잦아졌습니다. 전 이곳에서 하던 사업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번 경험을 살려 뉴욕에 새로이 지점을 오픈하기로 하고 준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들은 환경이 낯설고 아무것도 그곳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던 저에게는 큰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의 좋은 사람에게 부탁을 하고 떠나기로 했으나 어린 아들을 맡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저것 모든 조건이 고루 맞아야만 가능했지만 그녀는 저에게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하더군요.
이미 살고 있던 LA의 고급 아파트는 세를 주게 되었고 당장 떠나야했지만 걱정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좀 데리고 있으라며. 하지만 딱 잘라 거절하더군요.
당시 상황에선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으며 또 그녀의 집 대출금과 자동차 할부금 연체가 시작됐고 또 그녀의 신용카드 빚으로 본격적인 독촉 전화를 받을 때였기에 결국 그녀도 승낙을 했습니다.
마침내 뉴욕으로 갔으나 제가 이미 뉴욕 시장을 경험하기위해 불과 2개월 전에 뉴욕에 갔을 때와는 생각이 전혀 달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업에 있어서는 나름대로 노하우가 있던 저도 모르는 게 있었던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와 전혀 다른 날씨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산산이 부서진 신뢰













날씨가 정수기 사업의 발목을 잡고 말았습니다. 결국 2개월도 안되어 돌아오게 되었고 LA의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기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의 집으로 눈치를 보며 들어가게 되었고 그때가 그녀의 친인척들이 놀러오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녀와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하였습니다. 돈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뒤 이혼서류 수속도 끝나는 시기인지라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능력이 없으면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적어도 한달에 2만 달러이상의 생활비가 필요했지만 저는 이미 지난해부터 쪼들리는 상황이라 부족한 생활비를 채우기 위해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전 그녀의 아이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었으며 적어도 아빠보다 더 많은 용돈을 주고 비교할 수 없는 정성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이 사랑 보다는 돈이 우선이었기에 정말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는 집도 자동차도 문제가 될 것 같아 우선 정리를 하자는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우선 할부금이 비싼 자동차부터 처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업을 일시중단하고 다른 일을 하기위해 시험 행사를 했는데 다행히 처음부터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후라이팬을 한국에서 수입해 판매하는 일이었는데 시작부터 반응이 너무 좋아 여러 마켓에 데모 부스를 얻어 점포를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당장 들어갈 돈은 많은데 남의 눈치 보다가는 더 큰 망신을 사겠다고 생각했기에 후라이팬 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6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장사를 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교회를 가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는 이유로 온 집안의 살림을 책임져야하는 저에게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장사를 하라는 게 말이 되는지요.
무려 3주 동안 어린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장사를 했습니다. 장사를 끝내고 집에 오면 번 돈은 바로 그녀의 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2월 20일 LA 의 시티마켓에 본격적으로 옮겨 고정으로 세일즈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2월 21일 그녀와 전화로 언쟁을 하다가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그녀의 부모님께서 와 계셨고 저는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에게 한마디 하였습니다. 그날은 부모님 계신 앞에서 그 사람을 나무라고 싶은 마음이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저에게 “개XX 죽여버린다”라고 고함을 지르며 부엌에 있던 칼을 집어와 저의 목에 들이대고 죽일듯이 난리를 치는 게 아닙니까. 그녀의 부모님도 그 모습에 너무 놀라서 할말을 잊으셨고 저희는 큰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른들은 너무 화가 나서 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죽인다는 말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므로 중요하진 않지만 어른들, 그것도 자신의 친정어머니 앞에서 “왜 전화를 끊고 그래” 그 한마디에 어떻게 칼을 저의 목에 들이 댈 수가 있는지요.


아들 문제가 시비의 원인


다음날인 2월 22일 토요일 저는 일을 하기위해 LA로 가야했으나 아들이 문제였습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고객을 대하고 유달리 질문과 관심이 많은 제품이었기에 도저히 아들을 데리고는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이비 시터에게 맡기자고 했습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냐며 아침부터 신경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은 안 되니 당신이 알아서 하라”며 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10시가 넘어서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베이비 시터가 없다며 어린 아이를 그냥 혼자 두고 교회를 다녀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6살짜리 어린애를 집에 혼자 두고 교회를 갈수가 있습니까?
자신의 아들, 딸이라면 그렇게 하겠는지요. 기가 막혔지만 저는 아들을 바꾸라고 하며 아들에게 이모가 빨리 교회 다녀온다니까 TV 보고 그냥 있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첫 마디가 “이모가 TV 보지 말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그럼 무슨 일 있으면 집에 있는 팩스 전화로 저에게 연락하라고 말했더니 옆에 있던 그녀가  “전화는 무슨 전화”라고 하더군요. 너무 화가 났지만 이내 손님들이 몰려와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경 그 사람의 전화가 왔습니다. 자신의 친구와 저의 아들을 데리고 남동생 아내의 자동차를 타고 LA로 오겠다고, 그리고 집에 갈때는 저의 자동차로 갈 거라며 전화가 왔습니다.
LA에 약 5시경에 도착을 하였으며 저는 이내 반기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그 사람 역시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미안했던지 저의 일도 도와주며 마켓도보고 저녁 정리하는 시간까지 함께하였습니다.
비록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일을 하였지만 워낙 반응이 좋고 수입도 좋았으므로 이내 마음이 풀렸으며 그 사람의 요구대로 쇼핑몰도 같이 갔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미 시간이 꽤 늦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목소리가 완전히 돌아갔으며 너무 힘든 그런 상태였습니다. 근데 집으로 가는 도중 어린 아들은 자동차 안에서 잠이 들었고 이내 잠꼬대를 하며 잠투정을 했습니다. 뒷좌석 아들 옆에 않아있던 그 사람의 친구가 아들을 두드려 주며 달렸습니다.
잠시 뒤 또 잠투정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때 그 사람의 입에서 짜증이 석여서 아들에게 한마디 하더군요. 그리고 밤 11시가 조금 넘어서 집에 도착을 하자 친구는 돌아가고 아들을 방으로 옮긴 뒤 그로서리 정리를 하였습니다. 근데 그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가버리더군요.
그래서 저도 올라가서 그날은 정말 따지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서 신경질 적이냐’며 물었습니다. 말하기 싫다고 하더군요. 저도 말을 아껴야 했는데 그날은 화가 다시 나기 시작 했습니다.
집에 도착해 친구가 떠난 다음 최소한 물건정리를 도와주겠다는 말을 한마디하고 방으로 올라갔다면 저는 아마도 이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대충 정리를 하고 방으로 가서 따졌습니다.
그날은 저도 분명히 따졌습니다. 정확한 이유가 돈 때문인 줄 알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저의 질문에 말을 피해버렸고 전 다시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돈을 많이 주지 못하는 나는 미워한다고 치자”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 때문에 엄마도 없이 아빠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는 어린 아들이 불쌍하지도 않느냐며 따졌습니다.
근데 그 사람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네 아들이 미운지 말해줄까? 네 아들이 까부는 모습을 보면 네 생각이 나서 싫어. 됐어?”
참으로 기가 막히더군요.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지훈이(가명)를 싫어하는 거야?” 라고 물었습니다. 그다음 그 사람의 큰 목소리와 함께 내받은 말에서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래! 죽도록 미워! 둘 다 확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나가!” 순간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집었으며 그 사람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침대에 반 누어있던 그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사람을 저의 얼굴 앞에 대고 한번 더 말해보라며 다시 물었습니다.



경찰에 살인미수로 고발 체포되


이미 그때는 저의 손에서 피가 많이 흐르기 시작했으나 왜 내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잠시 뒤 그 사람은 자신의 머리를 만지더니 손에 피가 묻어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간 자신이 놀라며 흥분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911을 부르라고 하며 그 사람의 머리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911원의 안내원과 통화를 하는 도중 좀 전에 “자기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는 말은 사라지고 갑자기 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집주소를 주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 상황에서도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자신의 머리에 피가 나니까 당황해서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머리를 만지고 있는 사이 그 사람의 딸이 늦은 시간 학교에서 운동을 끝내고 왔는지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전 들어오지 말라며 큰소리로 말하였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들어오지 말고 삼촌에게 당장 연락하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뒤 아이 삼촌이 도착 하였으며 전 비로소 안심을 하였습니다. 비록 치과닥터이긴 하지만 그래도 의사이므로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것도 잠시 뒤 소리도 없이 무려 4대의 경찰 차량과 911 구급차량이 도착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다른 사람 보는 게 창피하니까 조용히 오라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토록 위급상황인줄알고 난리를 치며 저를 살인미수범으로 몰아간 그 사람의 주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던진 것은 유리잔 안에 들어가 있던 양초였습니다. 침대에 부딪치면서 깨졌고 깨진 파편이 그 사람의 머리와 저의 손등까지 날라들었던 것입니다. 저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레들랜드 경찰서로 압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진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진술 받는 도중 무전으로 살아온 현장에 있던 경찰관의 진술 기록이었습니다. 과연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가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말 그 사람의 진술은 천인공로 할 일이며 말도 안돼는 거짓으로 저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간 그런 진술이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처음 여자를 때렸습니다만 죽기 전에 말씀드립니다. 전 정상적인 상태가 분명 아니었습니다. 사탄, 마귀이상의 아주 큰 충격을 받았고 순간 정신을 잃었던 것입니다. 이제 와서 조금도 보태지도 더하지도 않습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오죽 남자가 못났으면 그토록 해주고도 그런 대접을 받느냐며 죽일 듯이 난리를 치는 저의 형님가족도 이제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고와서 저를 믿지 않던 형님 가족에게 그 사람의 행동이 너무 특이하고 도무지 정상적인 여자로서는 할 수 없는 온갖 욕설을 하는 내용을 저는 이미 2년 전부터 수집을 하였습니다.
그건 그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싸울 때마다 벌어지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담은 녹음 내용 중 일부를 형님 가족에게 공개를 하였습니다. 공개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 녹음 내용 중 무려 저를 3번이나 죽이겠다면 소리를 치고 온갖 욕설을 퍼붓는 그 녹음 내용을 법원에 제출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그리 부족하지 않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한테는 순한 양으로 살았던 죄 밖에는 없습니다. 왜냐면 전 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했기에 그 사람보다 무려 15년이나 젊고 예쁜 그런 아내와도 이혼을 했으며 그 사람 집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집안의 딸이었지만 전 그 사람과의 사랑을 택했습니다.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저를 욕할 수도 있습니다. 내용으로 보면 너무 바보 같은 남자가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바보입니다. 너무 부족하고 못났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의 마음속 영혼까지 다 바친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어 하루하루를 뼈저린 고통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울증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 제에게 극심한 우울증이 생겼습니다. 분노를 삭힐수가 없어 통곡을 하며 밤새 울기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 할 수가 없어 찾아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펑펑 울면서 돌아온 적도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자살과 분노로 죽지 못해 보내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나가고 정신과 상담도 받았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왜 제가 살인자가 되어야 하나요? 그리고 그 많은 죄를 아무것도 모르는 6살 어린 아들이 아빠의 죄를 안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요? 그 사람의 부모님도 찾았지만 결국 딸의 거짓증언만 듣고 딸의 편을 들더군요.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에게는 사죄의 용서를 구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죽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을 외치며 2개월을 넘기고 있으면서 하루하루 참고 또 참으며 재판을 보내고 있으면서 모든 게 내 탓이다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을 용서하기로 하였습니다.
근데 그 사람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 사람의 교육사업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 사람에게 소개 하였습니다.
그중 제가 이혼하기 전 저의 아이엄마의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가 있었으며 그 친구의 친언니가 교육 사업과 관련된 일을 한다며 소개를 받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전 그분에게 연락을 하게 됐고 그분과 손 잡고 우리 Academy Exchange 와 같이 일을 하며 업무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분은 저와 캐롤과의 관계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캐롤은 그분이 누구인지 너무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두 사람으로 인해 이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저의 아들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의 친언니라는 사실을 그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지경이 되어 자신을 도와줄 수 없게 되자 당장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젠 집까지 빼앗기게 되자 해결책으로 손을 잡고 한국에있는 친구 언니에게 몰래 연락을 해 금번 여름 캠프를 한국에서 하는 것으로 진행을 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그 사람은 모른척하며 이토록 고통 받고 있는 저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융자소송 비용을 대달라며 연락을 해왔습니다. 저도 인간이기에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 모두 이 세상을 떠나야 된다며 4월 29일 그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정신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기에 술을 많이 마시고 갔습니다. 진정으로 전 그 사람이 반성하는 부분이 있다면 금방 저의 마음이 약해져 돌아올 수 있는 그런 남자랍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자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듯 오로지 돈에만 관심이 있엇습니다. 그 순간 결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복용해오던 신경 안정제 수십 알을 그 사람 앞에서 저의 입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얼마 뒤 저는 쓰러졌고 의식불명 상태로 이틀을 레들랜드 메디컬 센터의 정신과 병동에서 있다가 나왔습니다. 죽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Caroline Kim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전 더 이상 이겨나갈 힘도 없습니다.
그 사람과의 지난 5년 세월에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모든 게 저의 잘못이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전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살아있다면 전 분명 더 이상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 사람과 같이 떠나야함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저 혼자 떠나는 것입니다. 6살 어린 아들은 엄마도 없습니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을 저 혼자서 몇 년을 키웠습니다. 어린 아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얼마나 분노에 고통이 크면 어찌 어린 아들조차도 눈에 보이지가 않는지요.
하지만 죽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의 인생에 분명 경종을 울리며 남은 인생에 더 이상 추악한 행동과 가면이란 탈을 쓰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그 사람과의 사건을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떠난 저의 편지를 가슴 아픈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항상 가정에 축복 충만 하시고 건강하심을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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