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보다 조선을 더 사랑한 일본인들: 영화‘박열’상영 계기·한일교류 새 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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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받는 이들을 사랑하며 자신을 던졌던 시대적 양심

/가네코 후미코/ 조선인 유학생 박열의 부인이며 독립운동 헌신

/후세 다쓰지/ 사형선고 독립투사 위한 변호에 일생 바쳐

/고토쿠 슈스이/ 조선의 자유와 안중근을 흠모해 詩를 헌정

‘조선독립에 혼신했던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舍生取義 殺身成仁 安君一擧 天地皆震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루었네
안중근이여, 그대의 일거에 천지가 모두 전율했소” —고토쿠 슈스이

안중근 의사는 임시정부광복군의 군인으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조선에 대한 일제강압정치를 주도한 제1대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르빈 역에서‘동양의 평화를 위해’사살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은 안중근 의사를 사형시키고 그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매장시켜버렸다. 1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도 안중근 의사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 통탄할 노릇이다. 위의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이 시는 한국인 의 작품이 아니고 일본인의 작품이다.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1871~1911). 그는 군국주의 일제 하에서 일본 최고위급 정치인을 암살한 조선인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 일본인이다. 지금 한국 영화가에서‘박열’이란 작품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영화에서 박열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 文子, 한국명 박문자,1903-1926)도 조선의 독립을 외치다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들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에 앞장선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1880~1953) 변호사도 영화에 소개된다. 영화‘박열’의 개봉을 계기로 역사자료와 언론에 소개된 글들을 정리해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들 중에서 대표적 인물 3명 을 소개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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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요즈음 분위기 에서 영화 ‘박열’이 한일교류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는 동기가 되기를 기대한다는 팬들이 많다. 조선인 동경 유학생 박열의 시를 흠모해 사랑하게된 가네코 후미코는 애초부터 조선인을 다르게 본 일본 여성이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1910)한 이후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땅에서 살면서 마침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를 부르는 조선인들을 경이롭게 보았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논문을 쓴 일본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후세 다쓰지, 성공한 변호사에게 보장된 평탄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후세 다쓰지는 법대생 시절부터 조선 유학생들과 교류했다고 하는데, 조선인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차별과 억압을 보며 일련의 불의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외친 조선유학생들을 변호하였다.

안중근을 흠모한 언론인 고토쿠 슈스이는 ‘조선의 독립은 당연하다’고 외쳤다. 고토쿠 슈스이는 사형 직전까지 감옥 안에서 의연하고 담담한 태도로 글을 썼다.

<나는 사형당하기 위해 지금 도쿄 감옥의 일실(一室)에 구금되어 있다. 아아, 사형! 세상 사람들 에게 이만큼 꺼림칙하고 두려운 말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신문에서 보고 책으로 읽었어도 설마 자기가 이런 꺼림칙한 말과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릴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정말로 사형에 처해지려 하고 있다. 평소에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들, 나를 아껴주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진위를 의심하며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리고 진실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한심하고 딱하고 슬프고 부끄러워했을까. 그중에서도 늙은 어머니는 얼마나 절망의 칼에 가슴을 찔렸을까. 그렇지만 지금의 나에게 사형은 아무렇지도 않다. 내가 어떻게 이러한 중죄를 저질렀는가. 공판조차 방청이 금지된 오늘날에는 본래 충분히 이런 말을 할 자유는 없다. 백 년 후에 누군가 어쩌면 나 대신 말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사형 그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다. (중략) 지금의 나에게 수치스럽고 꺼려지고 두려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형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악인이자 죄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내 스스로 논할 문제는 아니고, 또한 논할 자유도 없다. 다만 사형 자체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 (‘사생(死生)’ 중에서)
일본제국주의는 이런 일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다스렸다.

▲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들: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 후세 다쓰지 변호사, 지식인 고토쿠 슈스이

▲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들: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 , 후세 다쓰지 변호사, 지식인 고토쿠 슈스이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 그리고 고토쿠 슈스이. 그들은 그렇게 ‘조선’이라는 이름에 자신의 소중한 생의 전부를 다져넣었다.

그들이 그런 삶을 택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맹자의 말이나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장 15절)”는 성경 말씀에서 보듯, 인류는 광기와 잔인함으로 뒤덮인 역사 속 에서도 양심의 고삐를 끝내 놓지 않았고, 더욱 많은 인류의 더욱 넓은 자유는 그 양심들이 다진 토대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 그리고 고토쿠 슈스이는 ‘조선’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양심에 따라 약한 이들, 슬픈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던졌던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박열이 전향하여 “일본 국민으로 살 것”을 다짐하는 것을 보았더라도(박열의 전향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세 다쓰지 역시 그와 조선의 인연을 맺어주었다 할 2•8 독립선언을 쓴 춘원 이광수나 주동자였던 서춘, 백관수 등이 변절하여 친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실망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조선’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이름의 약자들이었다.

▲(좌) 박열을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변론 원고, (우)1926년 옥중에서 재판관의 배려로 함께 사진을 찍게 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 사진이 공개되자 일본 야당은‘대역죄인 우대’라고 비난했고 결국 내각이 무너졌다.

▲(좌) 박열을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변론 원고, (우)1926년 옥중에서 재판관의 배려로 함께 사진을 찍게 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 사진이 공개되자일본 야당은‘대역죄인 우대’라고 비난했고 결국 내각이 무너졌다.

일본인보다 조선인을 더 사랑한 가네코 후미코

1923년에는 20대 초반의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가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다 붙잡혔다. 사법 당국에 붙잡힌 그녀는 조사 과정에서 천황과 황태자를 ‘고깃덩어리’에 비유해 사형선고를 받았고, 천황의 특별 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에는 ‘조선 침탈의 원흉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특사장을 찢어버렸다. 박열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그녀는 결국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박열>은 일제강점기 일본 천황(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죄인’ 조선인 박열과 그 연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의 드라마틱한 삶을 소재로 했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영화 제목을 <박열>이 아니라 <가네코 후미코>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고 했다.

최근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어느 일본인에 대하여’라는 글을 쓴 김형민(PD)는 영화 ‘박열’에서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은 배우 최희서씨의 연기가 워낙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가네코의 무게는 주인공 박열을 여러모로 압도했다고 평가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인 박열의 시에 감동해 그를 찾아가서 동거를 제안하는 용감한 일본 여성, 일본에서 천황이 일종의 ‘신(神)’이었던 시절, 그 천황을 죽이겠 다는 음모에 가담한 강단 넘치는 무정부주의자의 삶의 궤적이란 그 자체로 영화를 넘어서는 스펙터클한 일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아버지는 가네코의 어머니를 싫어했고 그녀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 태어나 면서부터 ‘아비 없는 자식’이 돼버린 그녀의 유년 시절은 참혹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를 떠나 보낸 뒤 어머니가 이 남자 저 남자를 떠돌았던 와중에 가네코의 어린 시절이 행복할 리 없었다. 그러던 중 친척이 살던 조선으로 건너와 충청북도 청원 부근에서 지냈던 가네코는 그곳에서 중대 한 경험을 하게 돼 바로 1919년 폭발한 3•1 운동이었다.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맞서는 조선인들의 영상은 그녀의 뇌리 깊숙이 박혀 그녀는 조선인들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하지만 일본인 할머니는 그녀가 조선인과 어울리는 것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녀는 ‘죽고 싶을 만큼’의 구박을 받았다. 가네코의 소학교 학적부에는 고막이 터지는 등 학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그녀는 금강 주변을 지나는 철로에서 물에 빠져 죽으려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금강의 물줄기 앞에서 삶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아직 사랑할 만한 것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가 발견한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상(아나키즘)이었고, 그 동지 들 속에서 만난 연인이 조선인 박열이었다. “내가 찾고 있던 사람,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박열과 가네코는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어난 검속에서 천황 폭살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 됐다. 가네코 후미코는 법정에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자아를 확대하는 것이다. 나는 박열을 사랑 했고 박열은 조선을 사랑했다. 그래서 나는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다.” 라고 소리첬다고 한다. 23년의 짧은 인생이지만 조선독립에 불을 태운 그녀는 죽은 다음 박열과 가네코후미코는 옥중 에서 서류상으로 결혼했기에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문경에 사랑하는 박열 묘에 안장했다.

독립투사 변호에 앞장선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조선인 독립투사를 변호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2.8 독립선언 이후부터 조선인 독립 투사들의 변호를 맡은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조선건국헌법 초안’을 만들어 박열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다쓰지 변호사가 열네 살 때였던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이어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일본군 에 복무했던 마을 사람 하나가 돌아와서는 조선인들을 쫓으며 죽여댄 이야기를 자랑스레 떠벌리 는데,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커다란 분노와 함께 조선인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고했다.

1911년에 이미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라는 글을 썼다가 일본 당국의 조사를 받을 만큼 조선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1919년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이 단행한 2•8 독립 선언을 변호 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과의 연대에 나섰다. 그는 조선유학생들에게 내란죄를 적용 하려는 시도에 맞서 법정에서 이렇게 외첬다.

“유학생 신분으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부르 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된단 말인가? 당치도 않다.”
다쓰지 변호사는 일본 황궁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의 변호인이 그였고, 영화 <밀정>의 주인공이라 할 김시현과 황옥을 변호한 이도, 신분 차별이 철폐된 뒤에도 인간 취급을 못 받던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인 형평사 운동을 지원한 이도, 1차•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맡아 법정투쟁을 벌인 이도 후세 다쓰지 변호사였다.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과정에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는 건 기본이고, 감옥살이까지도 마다 하지 않았던 이 변호사를 조선 사람들은 마음 깊이 담아두게 되었는데 다쓰지 변호사의 손자는 우유가 귀하던 시절 조선인 우유 배달부가 꼬박꼬박 공짜로 넣어주던 우유를 기억하고 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재일 조선인 유종묵은 이렇게 고인을 추모한다. “선생님은 조선인에게 아버지와 형 같은 분이었고 구조선과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1919년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 유학생의 변호를 맡는 것으로 조선의 독립운동 지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는 법정에서 조선 침략의 부당함을 폭로했으며 내란죄 명목으로 잡혀 온 조선 유학생들에 대해 무죄를 주장한다. 1923년 9월 1일 진도 7.9의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과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인 의 집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조선인 6천 여 명이 학살당한다.
이때 다쓰지 변호사는 ‘자유법조단’을 창립하여 조선인 학살에 일본 정부와 군, 경찰이 가담한 사실에 대해 고발하고 책임을 물었을 뿐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하고 자책한다’는 내용의 사죄문을 한국의 신문사로 보내기까지 한다.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로 인해 조선 농민들이 조선총독부에 토지를 빼앗길 때는 조선 농민들을 돕기 위해 조선에 방문하여 사태를 파악한 후, ‘일제 식민지 정책의 약자에 대한 압박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소감을 말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식민지 농업정책의 부당함을 알리려 애썼다. 다쓰지변호사는 일련의 행적으로 인해 일제 당국으로부터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혀 변호사 자격을 박탈, 말소당했고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광복 이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 재일조선인의 인권신장(선거권 부여 운동)을 위해서 활동했고 조선의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조선건국헌법초안>(1946)의 공동 집필에도 참여한다.

다쓰지 변호사는 1953년 만 72세의 나이로 타계했는데 생전 그에게 도움을 받은 수많은 조선인이 찾아와 조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는 2004년 (일본인으로는 최초이며 현재까지 유일하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조선 독립에 큰 도움을 준 위인인데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그를 소개하는 교과서와 콘텐츠가 적어 안타까울 뿐이다.

조선의 독립을 외친 일본의 지식인 고토쿠 슈스이

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고토쿠 슈스이는 1907년에 일본의 조선 식민화에 반대한다는 위험한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문제적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 당하고 3개월 후인 1910년 6월 고토쿠 슈스이는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그리고 1911년 1월 24일, 비밀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불과 일 주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를 죽음 으로 몰고 간 이른바 ‘대역 사건’의 전모는 사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SBS는 지난 2011년 8월 15일 광복절 특집 다큐멘타리 ‘조선 독립의 숨은 주역, 일본인 독립투사들’ 이란 제목으로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들을 조명했다. 그 첫번째가 고토쿠 슈스이다.

다큐 제작진이 일본 국회도서관 자료실에서 입수한 1907년 7월21일자 ‘오사카 평민신문’에는 ‘조선 인민의 자유, 독립, 자치를 위한 권리를 보장하라’는 내용의 결의문이 실려 있다. 당시 1907년은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내정 간섭을 본격화하는 등 강제 병합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였다. 누구도 일본 땅에서 한반도 문제를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 에서 고토쿠의 글은 거의 유일한 반대 목소리였다. 조선 사람 들조차 대놓고 ‘독립’을 말하지 못한 시기에 이런 글을 작성한 사람은 바로 일본인 고토쿠 슈스이다. 이같은 고토쿠 슈스이의 행동은 일본으로서는 대역죄로 다스리는 당시 일본에서 일본 국민들에게 조선의 독립을 외쳤으니 그야말로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었던 것이다.
고토쿠 슈스이는 190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를 만들고 그의 의거를 기리는 한시를 지어 직접 엽서에 써넣었다. 처음에는 일본 국내에서 만들었으나 일본 정부가 발매를 금지하자 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제작해 일본으로 들여왔다.

현재 전하는 안중근 초상 엽서는 고토쿠 슈스이가 대역 사건으로 체포될 당시 그의 품에서 발견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사건의 증거와 재판 과정 등 대역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면서 이 엽서 역시 은폐했다. 그 뒤로 오래도록 실물이 발견되지 않다가 1960년대 말에 메이지학원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전남과학대 김정훈 교수(일본근대문학)는 교수신문에 “안중근 의사가 일깨운 일본의 양심, 일본 혁명군의 천황 암살시도로 이어져”라는 제목의 글(2013년 11월 25일)에서 주목할만한 한일교류 의 선례로 일본 대역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혁명가 고토쿠 슈스이가 안중근 의사에게 영향을 받은 점을 강조해 주목을 끌었다
“놀랍게도 고토쿠가 체포됐을 때 그의 압수물에서 안중근 사진과 안중근의 거사를 칭송한 고토쿠의 한시가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간자키 교시는 그 한시와 안중근의 사진을 새긴 그림엽서 실물이 명치학원대학 도서관 오키노 이와사부로 기념문고에 소장돼 있다고 밝혔다.” (간자키 교시『혁명전설 대역사건의 사람들 3』, 하가서점, 1969년)

김 교수는 이같은 사실이 고토쿠가 안중근의 투쟁심에 깊은 감명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 하게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즉 그 한시와 엽서는 고토쿠 뿐만 아니라 고토쿠와 연을 맺고 있던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것이다. 전쟁반대와 동양평화를 절실히 기원하던 안중근의 혼백을 고토쿠도 흉중에 품고 있었는데, 이는 안중근의 결의와 사상을 흠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조선 식민화를 비판하고 안중근을 존경했던 양심적 지식인으로 불리는 고토쿠 슈스이는 동아시아 최초로 <공산당 선언>을 번역한 혁명 사상가로 알려지고 있다. 1965년 일본 대법원의 고토쿠 슈스이에 대한 재심을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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