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LA올림픽과 한국인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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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올림픽 첫 출전은 1932 LA하계 올림픽
■ 한국 마라톤 왕국의 역사 1932 LA올림픽이 효시
■ 1932 LA올림픽에서 태극기 감고 뛴 한국인 선수
■ 새미리 올림픽 메달 꿈은 1932 LA올림픽이 씨앗

2028년에 LA에서 올림픽 대회가 다시 3번째 성화를 불태운다. 미국으로서는 1904년 세인트 루이스 올림픽을 선두로 총 9번째 올림픽 대회가 열리게 되는 셈이다. 1932 LA 올림픽, 1932 레이크 플래시드 동계올림픽, 1960 스쿼밸리 동계올림픽, 1980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 1984 LA 올림픽, 1996 애틀랜타 올림픽,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등이다. 이중 특히 LA올림픽 대회와 한국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한국은 1932년 LA올림픽대회에 일제강점기라서 독립국 자격으로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한국인 출신 선수가 출전하는 기록을 남겼다. 1984년 LA대회에는 차기 올림픽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해 금메달 6개·은메달 6개·동메달 7개의 성적으로 종합순위 10위를 기록한 인연이 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는 1932년 LA 올림픽 대회에서부터 전설을 이어받게 되었다. <성진 취재부 기자>

LA 1932년 올림픽대회 당시는 미국은 경제대공황으로 어둡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경기회복의 일환으로 LA는 올림픽대회 축제 준비로 분주했다. 그런 1932년 어느 날 LA다운타운 거리를 한 중고트럭이 달리고 있었다. 식품점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새벽 야채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싣고 돌아가던 중 콜로세움 경기장을 지나게 된 12세의 소년은 오색찬란한 만국기가 펄럭이는 광경을 보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파파, 왜 저렇게 많은 깃발들이 걸려있나요?”
“다음 주면 올림픽대회가 열리기 때문이지.”
“그게 뭔데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회인데 전세계 운동 선수들이 참여해 종목마다 최고 우승자를 가리는 영광스러운 자리란다.”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파파, 저도 올림픽 챔피언이 될 거예요.”
“무슨 종목으로?”
“지금은 모르겠지만 곧 찾아 낼게요.”

이날 이후 LA 콜로세움을 지나며 경기장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소리를 들으며 올림픽 챔피언의 꿈을 키운 이 소년은 훗날 1948년 런던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미국 선수로 참가해 다이빙 10m 플랫폼 부문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올림픽 영웅” 새미 리 박사( Dr. Sammy Lee)이다. 1932년 LA올림픽에서 새미 리 박사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것이고, 결국 이루어 냈다. 특히 우리에게1932년 LA올림픽은 당시 식민지 조선 선수들이 일본의 국기 아래 올림픽과 처음 으로 만나는 대회였다. 육상 마라톤에서 2명, 복싱에서 1명의 선수가 출전하며 총 3명의 선수가 출전했는데, 조선 출신 선수들 중 최고 성적을 올린 선수는 육상 마라톤의 김은배(공식 기록상은 일본식 이름인 긴 온바이) 선수로서 6위를 기록했다. 또 같은 종목에서 권태하(곤 다이카) 선수가 9위, 그리고 복싱 남자 라이트급에 황을수(고 오쓰슈) 선수가 1회전 탈락이라는 성적을 각각 기록했다.

무엇보다 한국 마라톤의 역사적인 신호탄이 이 1932년 LA올림픽대회에서 울린다. 그 주역은 각각 6위와 9위를 차지한 김은배와 권태하. 이들은 경성과 동경에서 가진 올림픽 파견 선발전에서 일본 선수들을 압도적으로 따돌리고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현지에 도착해서는 일본 임원들의 유치한 계략으로 인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일본 임원들은 3위로 선발된 쯔다만을 코스 답사를 시켰으며 육상화조차도 차별적으로 지급하는 등 일본 선수를 우승시키기 위해 우리 선수들의 희생을 노골적으로 강요 했다. 제대로 맞지 않는 신발 때문에 자신의 기록도 내지 못하고 권태하는 9위로 주저앉았으며, 10km 지점까지 꼴찌로 달리던 김은배는 연도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동포들의 독려에 분전, 6위로 입상한다. 현지에서의 불이익만 아니었다면 손기정의 영광은 훨씬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두 선구자들은 육상에서 유일하게 정상권에 진입해 있는 한국 마라톤의 건국 신화임에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LA올림픽은 ‘아메리칸 드림’

당시 조선 선수들이 올림픽에 당당히 참가한다는 소식은 당시 미주 전체 1만여명도 안되는 동포 사회와 LA현지 동포들을 들끓게 했다. LA의 한인동포들은 조선 선수들을 위해 성대한 환영식을 열었고, 마라톤 코스 곳곳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을 보냈다. 당시 조선에서는 태극기를 볼 수 없던 식민지 시절이었다. 김은배 선수는 LA의 동포로부터 건네 받은 태극기를 몰래 숨기고 귀국해서 평소 친분이 있던 동아 일보 이길용 기자에게 건네 주었다. 당시 이길용 기자는 김은배와 권태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슬쩍 지우고 게재한 주인공이기도 한데 이때는 다행히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4년 후에 1936년 배르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그여코 터지고 만다.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서 권태하의 생애와 그의 마라톤 및 다양한 스포츠 활동 등 그의 마라톤 인생 을 통해서 체육사적 가치를 밝히는데 엿볼 수 있다. 한국인 마라톤의 선구자를 우리는 모르고 있다. 권태하는1906년 충청북도 충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중동 학교를 거쳐서 메이지 대학과 LA의 USC에서 학업을 이룬 선구자였다. 그는 LA올림픽이 끝난 후에 USC대학교에서 크롬웰 코치의 지도하에 새로운 과학적 인 마라톤 코칭법과 훈련법 등을 배우며 체육학을 전공했으며, 귀국 후에 선수, 마라톤지도자, 스포츠 행정 가로서 활동을 했다. 그의 마라톤 인생을 통해서 살펴본 체육사적 가치는 첫째, 의지와 투혼의 마라토너로서의 귀감, 둘째, 새로운 과학적인 마라톤 코칭법 과 훈련법 등의 의론 도입 및 전파, 셋째, 선진화된 스포츠 정신의 정립, 넷째, 한국 마라톤계의 개척자이자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활동 등을 이룩한 선구자였다.

한편 황을수 선수는 한민족이 최초로 참가한 1932년 LA올림픽의 복싱경기에 출전하였다. 비록 그 성과가 순위 입상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일제강점기 ‘압제와 차별’ 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극복 하고, 식민치하 약소 민족의 역량을 세계 만방에 선보였다는 측면에서 그 성과의 길이는 찰라 이지만 깊이는 심히 장중하다. 아울러, 이러한 황을수의 행적은 광복이후 ‘KOREA’ 가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 참가국으로서의 위용을 갖추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황을수는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일본 유학 시절 권투를 시작하여 동북아를 넘어 아시아에 그 이름을 크게 알리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월북 하였기에 남한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LA동포들의 눈물의 환영식

1932년 7월 30일부터 8월 14일까지 LA에서 개최된 제10회 하계올림픽대회는 LA 메모리얼 콜리세움을 포함한 본격적인 선수촌과 체육관이 새롭게 건설되었지만 교통 문제로 37개국 1,331 명의 선수만 출전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150만명의 관중이 운집, 통신 기술의 혁신으로 프레스 센터를 통한 보도가 과학적으로 이루어져 신기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흑인 육상의 시대가 서서히 개막되었다. 당시 일본은 1932 LA올림픽 당시 전체 성적에서 5위를 할 정도로 스포츠 강국이었다. LA대회에서 미국은 금메달 41개로 1위, 2위는 이탈리아(금메달12), 3위는 프랑스(금 10), 4위는 스웨덴 (금 9), 5위는 일본(금7)이었다. 일본의 도약은 LA 대회에서 무서웠다. 서구인들의 시선으로 볼 때 이 신기하고 낯선 동양인들은 6개의 금메달이 걸린 남자 수영에서 4개의 올림픽 신기록을 포함한 5개의 금메달을 독식, 미국 수영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다.

100m 자유형에서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야쓰지 마자키의 기록은 무려 58초 2. 그리고 그는 17세에 불과했다. 더욱 놀랄만한 것은 자유형 1500m 우승자 기타무라는 14세의 소년이라는 사실. 이 때부터 초인적인 강훈으로 신체적 한계를 극복한 일본 스포츠의 신화가 쓰여 지기 시작한다. LA올림픽에서 올림픽타운이 지어 졌긴 하지만 당시 여자 선수들은 들어갈 수 없었으며 130여명에 달하는 여자 선수들은 따로 호텔에서 숙박을 하였다. 여자들이 남자 숙소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카우 보이들이 지키고 서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개최국의 텃세도 나타났다. 시범종목으로 3연속으로 있던 라크로스와 미식 축구가 새로 시범종목으로 들어갔으며, 필드 하키도 정식종목화 되었다.

반면 미국에서 입지가 유달리 약했던 축구는 1908년 런던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24년만에 1932 LA대회 정식종목에서 빠지게 되었다. 축구가 정식종목에서 제외된 것은 1908년 정식종목 채택 이후 지금까지 1932년 LA대회가 유일하다. 바로 4년 뒤 독일에서 열린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축구는 다시 정식 종목으로 돌아왔고, 이 때부터 현재까지 축구는 올림픽 정식종목 지위를 굳건히 유지 중이다.

LA올림픽 주경기장인 LA 메모리얼 콜리세움은 20여년 후 브루클린에서 연고 이전한 LA 다저스의 홈구장으로 다저 스타디움이 세워지기 전 3년 동안(1958~61) 기묘한 모양의 야구장으로 이용되었고, 제1회 슈퍼볼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이후 1984 LA 올림픽에서도 주경기장으로 다시 사용 되었다. 다저스 말고도 프로 미식축구 팀인 LA 램스, LA 차저스, LA 레이더스 등이 이 구장을 사용 하기도 했다. 현재는 USC 대학의 미식축구팀인 트로이잔스가 사용하고 있는데, 트로이잔스는 무려 1923년부터 지금까지 이 구장을 사용하고 있다.

1932 LA올림픽 150만명 관중 운집

지금은 한국 양궁팀이 올림픽에서 단연 최고의 메달 박스이지만, 그 역사는 올림픽에 첫 출전한 1984 LA올림픽에서다. 1971년의 한국 양궁은 전국체전 시범종목으로 실시되었지만 국제교류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1972년 뮌헨올림픽 참가를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동년의 장애인 올림픽 양궁 개인전에서는 첫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체육입국이라는 정책 하에 KOC와 대한양궁협회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은 한국 양궁팀의 든든한 기반이 되어 경기력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 결과 1984년 LA올림픽 출전 이전에 중국과 일본 선수들이 주는 위기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유례 없이 엄격한 3차례의 선발 전을 실시하였다. 한국 양궁 국가대표선수들은 올림픽을 대비하여 최면요법, 참선, 새벽명상 등 심리 훈련을 통해 경기전에 컨디션을 조절하였다. 첫 출전 1984 LA올림픽의 쾌거는 이후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서울올림픽에서의 금메달 전망을 한층 밝게 해 주었다. 게다가 대한체육회는 양궁 중목에 대해 집중 투자하는 한편, 스포츠과학의 본격적인 개발을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1984년 LA올림픽에 참가하여 한국 구기 종목 최초로 올림픽 은메달의 성적을 거둔 여자 농구 대표팀의 역사도 전설이다. 당시 1984 LA올림픽대회 보이콧의 시대(1983년 KAL기 격추사건)에서 LA올림픽 본선에 진출하게 된 한국여자농구대표팀은 태릉에서 실시된 훈련을 통해서 숙적 중공에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여자농구대표팀의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 는 밑거름이 되었다. 1984년 당시, 한국여자농구 대표팀의 승전보는 국내에서 응원하고 있는 국민을 비롯한 현지 미주 동포에게도 힘이 되었다. 당시 TV나 신문을 통해 접하는 선수들의 승전보에서 함께 기뻐하고, 선수 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국민들은 1988서울 올림픽의 기대를 만들어 갔다. 그래서 또 하나의 한국인의 올림픽 역사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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