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own밤문화, 그때 그 시절 2] 만남의 광장에서 해방구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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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 초기 밤문화 ‘단순한 유흥을 넘어, 노스탤지어 노릇’
◼ 고국을 떠나온 이들에게 ‘만남의 광장’이자 ‘해방구’였다
◼ 초기이민자들에 영혼을 따뜻하게 안아 주던 치유의 공간
◼ 가족 단골 문화와 사랑방 분위기 없어지고 화려한 간판만

LA 코리아타운의 밤문화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나이트클럽들과 그 시절 이민자들의 생생한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당시의 밤문화는 단순한 유흥을 넘어, 고국을 떠나온 이들에게 ‘만남의 광장’ 이자 ‘해방구’ 역할을 했다. 그 시절 7080이라 불린1세들이 사랑했던 전설의 나이트클럽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타운의 밤문화를 호령했던 대표적인 업소들은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당시 밤문화에는 이민 생활의 애환과 독특한 시대상이 녹아 있었다. 그 당시 나이트 클럽의 웨이터 이름이 “조용필”, “장동건” 등등이었다. 그 시절 K타운의 밤문화는 번쩍이는 유흥이기 전에, 낯선 미국 땅에 뿌리내리려 발버둥 치던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영혼을 따뜻하게 안아 주던 치유의 공간이었다. <특별취재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LA 코리아타운 8가와 올림픽 거리는 오늘날의 화려한 네온사인과는 다른, ‘눈물 젖은 찐한 한국적 낭만과 향수’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준 최 나이트클럽, 김익호 밴드와 국민 가수 박재란 등등이 라이브 무대를 누비던 8가 중심의 코리아타운 분위기와 라이브 음악 문화는 이민자들에게 단순한 유흥 이상의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 7080 시절 한인타운 8가와 올림픽 거리의 풍경은 당시 8가와 올림픽 블러버드 일대는 한인 이민자들이 본격적으로 상권을 일구기 시작한 코리아타운의 ‘본진’이었다.

고향의 골목길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정취가 풍기는 곳이었다. 밤이 되면 “서울의 어느 골목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한국어 간판과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고기 굽는 냄새, 찌개 냄새가 진동했다. 낮에는 고된 노동, 밤에는 8가와 올림픽가로 결집하는 분위기였던 당시 이민자들은 낮에는 언어 장벽 속에서 다운타운 봉제공장, 세탁소, 주유소 등에서 몸이 부서지라 일했다. 그렇게 쌓인 고단함과 서러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밤문화였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위로하던 시절이었다.

낭만과 눈물로 채워졌던 당시 밤문화

그 시절 피아노를 치면서 열정적인 노래를 불러주던 준 최는 한인타운의 밤을 낭만과 눈물로 채워주던 대표적인 거장이었다. 미8군 클럽 출신으로 한국인 최초로 라스베가스에 진출해 활약했고, 은퇴 후 LA에서 한인 어르신들을 위한 노래 교실을 운영하며 명성을 떨친 음악인은 바로 ‘준 최(Jun Choi)’ 원장이다. 준 최는 1950~6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요람이었던 미8군 무대에서 전설적인 음악가 고(故) 이봉조 선생의 악단 등과 함께 드럼 및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며 독보적인 실력을 인정 받았다.

그는 1960년 외국인 전용 UN센터에서 연주하던 중, 방한한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밥 호프(Bob Hope)’의 눈에 띄어 미국 진출 기회를 얻었다. 이후 1962년 5인조 밴드 ‘선스팟(Sun Spot)’을 결성하여 라스베가스의 유명한 스타더스트(Stardust) 호텔과 시저스 팔래스(Caesars Palace) 호텔 무대에서 리딩 엔터테이너로 수년간 대활약 했다. 1965년 LA로 이주한 후, 1960~70년대 8가 코리아타운의 태동기에 ‘김치 카바나(Kimchi Cabana)’, ‘갤리온 클럽(Galleon Club)’, ‘와바 클럽(Waba Club)’ 등 초기 한인들의 향수를 달래주던 전설적인 라이브 클럽들을 직접 운영하며 타운 밤문화를 이끌었다.

그 시절 타운 골목의 밤을 낭만과 눈물로 채워 주던 대표적인 거장이 바로 이 ‘준 최’ 이다. 바로 LA 한인 타운 밤문화의 개척자이다. 준 최는 2008년 현업에서 공식 은퇴한 후에는 LA에서 ‘준 최 노래교실’을 열어 한인 시니어들에게 노래를 지도했다. 특히 미국에 살면서도 미국 국가를 잘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미국 국가(The Star-Spangled Banner) 부르는 법을 열정적으로 가르쳐, LA 시정부와 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으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밤문화의 대표적인 거장은 바로 ‘준 최’

당시 타운의 밤문화에는 김익호 밴드와 가수 박재란이 주던 위로의 무게가 있었다. ‘산 넘어 남촌에는’ 박재란과 당대 최고 스타들의 이민 물결이 몰려와, 한국에서는 TV에서나 보던 대스타들이 코리아타운 8가의 스탠드바나 클럽 무대에서 바로 눈앞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불러 주던 시대였다. 60년대 한국 가요계의 톱스타였던 박재란을 비롯해 윤복희 들 많은 은퇴·중견 가수들과 정상급 연주자들이 이 시기에 LA로 이주했다. 이들 가수들과 함께 향수를 자극하는 라이브 밴드 음악의 김익호 밴드와 같은 현지 실력파 한인 라이브 밴드들의 연주는 기계음이나 주크박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여기에 박재란이 특유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히트곡을 부르거나 고향 노래를 부르면, 술을 마시던 이민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노래 한 곡 한 곡이 고국에 두고 온 부모 형제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는 최고의 강장제였다. 그 시절 코리아타운의 밤문화만의 독특한 특징은 가족 같았던 단골 문화와 사랑방 분위기였다.

그 당시의 업소들은 주인이 손님의 이름은 물론,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지, 아이가 몇 명인지 까지 다 꿰고 있을 정도로 가족적이었다. 외로운 타향살이에서 업주와 손님, 가수와 관객이 모두 ‘이민 동지’라는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여 있었다. 당시 대호클럽 산호클럽 등 나이트클럽 분위기는 ‘블루스’와 ‘고고 춤’으로 이민생활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는 장소였다. 라이브 음악에 맞춰 가볍게 블루스를 추거나, 신나는 고고 리듬에 맞춰 막춤을 추며 이민 생활의 홧병과 스트레스를 털어내곤 했다. 멋지게 정장을 차려 입은 신사 숙녀들이 우리말로 대화하며 정을 나누던 낭만 가득한 사교장이었다. 당시 밤문화에는 이민 생활의 애환과 독특한 시대상이 녹아 있었다. 나이트클럽 웨이터들은 손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당대 최고의 연예인 이름이나 ‘박쥐’, ‘휘발유’, ‘조로’ 같은 별명을 썼다. 입구에서 “누구 찾으세요?”라고 물으면 “조용필이요!”라고 외치고 들어가는 것이 당시의 불문율이자 재미였다.

당시 한국식 ‘부킹’은 이민 사회에서 짝을 찾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웨이터가 여성 손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손을 잡고 룸으로 이끄는 광경이 흔했다.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남성 손님들은 웨이터에게 두둑한 현금 팁을 찔러 주는 것이 필수였고, 이는 당시 유학생이나 젊은 사업가들의 재력을 과시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199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과 함께 유입된 부유한 유학생(일명 ‘유학파’) 들이 등장 하면서 타운 밤문화가 고급화되었다. 나이트클럽 앞에는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BMW, 벤츠 등 고급 승용차들이 발렛 파킹을 위해 길게 늘어섰고, 이는 ‘동포’ 청년들과의 미묘한 신경전이나 패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외로운 타향살이 업주, 손님 모두 ‘이민 동지’

당시 분위기는 1차에서 4차까지 이어지는 ‘네버엔딩’ 술자리가 유행했다. “1차 고기, 2차 나이트, 3차 노래방, 4차 감자탕”으로 이어지는 공식은 고된 이민 노동의 보상 심리였다. 새벽까지 장사나 일을 마친 1세대들은 해가 뜰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한국에 금방 돌아갈 거야”라는 다짐과 푸념을 나누곤 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올림픽 거리의 해장국 집들은 이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는 마지막 안식처였다. 그 시절 나이트클럽으로 가보자. 올림픽과 노르망디 인근에 영빈관(VIP Palace)이 있었다. 이 곳은 1970~80년대 한인 커뮤니티의 ‘청와대’이자 ‘마을회관’ 같은 곳이었다. 낮에는 결혼식과 돌잔치가 열리고, 밤에는 한인 1세대들이 밴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고고장으로 변신했다. 정치인 후원 파티부터 피로연까지 모든 대소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1970년대 타운의 밤문화를 이끌며, 색소폰 연주자 겸 작곡가 김익호가 이끄는 ‘김익호 밴드’와 가수 박재란이 주로 활동했던 나이트클럽은 한인타운 8가 길에 위치한 ‘타이거(Tiger)’ 나이트 클럽이었다. 초기 LA 한인 유흥 문화의 중심지로 1970년대 이민 1세대들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대표적인 밤문화 명소 중의 하나였다. 당시에는 기계 음악이나 디스크자키(DJ) 중심이 아닌, 실력파 뮤지션들의 생생한 라이브 연주가 무대를 채웠다. 테너 색소폰의 거장이자 마스터였던 김익호의 밴드가 수준 높은 경음악과 반주를 제공했다. 국내에서 ‘삼천만의 연인’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누리다 미국으로 이주한 가수 박재란이 이 클럽의 간판 가수로 무대에 서며 동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막대한 출연료를 기록하기도 했다.

고국을 떠나온 한인 연예인들과 동포들이 모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슬픔을 공유하던 일종의 ‘문화적 사랑방’ 역할을 겸했다. 지금도 이름이 이어지는 웨스턴(Western)과 6가의 마마 라이온 (Original Mama Lion)은 1970년대 후반부터 운영된 타운의 터줏대감이다. 당시에는 중년층의 사교 클럽 성격이 강했으며, 현재는 그 이름을 딴 힙한 라운지 바(Mama Lion)로 재탄생하여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LA 웨스턴 에비뉴와 4가 인근에 있었던 ‘애니정 나이트클럽’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LA 한인타운의 밤문화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한국식 스탠드바 겸 나이트클럽이었다. 당시 한인타운을 주름잡던 수많은 유흥업소 중에서도 독보적인 개성과 에피소드를 자랑했던 곳이었다.

이름 자체가 독보적인 여성 오너의 이름, ‘애니 정’이었다. 당시 한인타운 유흥업계는 남성 업주들이 주류를 이뤘으나, 이곳은 ‘애니 정(Annie Jung)’이라는 당차고 수완 좋은 여성 주인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걸고 영업했다. 주인의 이름을 걸고 운영했던 만큼 손님 관리가 철저했고 친근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완전한 대형 댄스 나이트클럽이라기보다는, 무대와 라이브 밴드 연주가 있고 맥주와 양주를 편하게 마실 수 있는 한국식 ‘스탠드바’ 겸 나이트클럽 형태였다. 적당히 어두우면서도 아늑한 조명 아래,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섹시한 여성 연주자의 매력적인 미소가 밤늦게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애니정 나이트클럽은 90년대 LA 한인타운에서 청춘과 중년의 경계를 보내 며 이민 역사의 전성기를 함께 이끌었던 한인들에게 “그때 참 뜨겁고 치열하게 놀았다”는 진한 추억과 낭만을 남겨준 상징적인 명소였다. 윌셔와 웨스턴 인근 고층 빌딩에 자리한 클럽 360(Club 360)&클럽 란저리는 2000년대 초반, 외로운 타향살이에서 업주와 손님, 가수와 관객이 모두 ‘이민 동지’. 탁 트인 LA 야경을 배경으로 한국 나이트클럽의 시스템(웨이터의 손님 끌어주기)을 완벽하게 구현하여, 주류 언론인 LA 타임스가 “한국식 데이트 문화가 LA 밤을 달구고 있다”며 신기해 하는 기사를 낼 정도였다.

“한국식 데이트 문화가 LA 밤을 달구고 있다”

코리아타운의 밤문화는 200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며 코리아타운의 밤문화가 대형 룸살롱, 힙합 클럽, 그리고 오늘날의 세련된 소주방과 라운지 바 형태로 급격히 재편되기 시작했다.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는 스탠드바 형식의 업소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특히 웨스턴 4가 구역의 상권 변화가 변화를 주도했다. 과거 애니정 나이트클럽이 있던 웨스턴과 4가 인근은 현재 다른 한인 식당, 메디컬 빌딩, 리테일 상가 등으로 완전히 리모델링되거나 업종이 전환되어 과거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초기 밤문화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배경에는 유흥 트렌드의 세대교체가 불러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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