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김신조 사건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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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추봉 재미 육사 총동창회장(예비역 대령)의 안보체험기 시리즈가 이어집니다.

ⓒ2005 Sundayjournalusa

한반도의 휴전선이 불안한 상태에서 현 노무현 정권의 안보태세가 위기를 맡고 있다. 북한을 주적에서 제외시킨 현 정권의 국방태세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최추봉(예비역 대령) 재미 육사 총동창회장이 입을 열었다.

지난해 휴전선 최전방 철책 절단 사건에 대한 의혹이 풀리기는커녕 갈수록 증폭되어 야당에서는 국정조사까지 벌이겠다며 압박하고, 국민적 불신에다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당국은 의혹을 풀 만한 조사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월북자의 신원이라도 파악되면 의혹이 풀리겠지만 사건 발생 이후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어 고민스럽다”고 토로할 정도이다. 월북자를 단순히 민간인으로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은 만큼 해당 부대 전역자 등을 상대로 군과 경찰, 민간 전문가까지 총동원해 조사를 하고 있지만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윤광웅 국방장관도 “철책이 뚫린 것을 (나도)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다”고 말할 정도다. 국방부와 국정원 기무사 등의 합동조사와 유엔사의 별도조사에서도 ‘남쪽에서 월북’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만 ‘누가? 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정부는 “민간인이 월북했다”는 발표를 내놓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정부 발표를 신뢰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이 같은 정부 발표에 대해 최추봉 회장은 1968년 청와대 무장공비 사건의 감춰진 사실을 공개하면서 오늘의 안보대세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정리-성진 기자>


















당시 무장공비들은 청와대를 습격하려다가 비상근무중이던 경찰 검문에 걸리자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4대의 시내 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살상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날 밤 대간첩 작전을 지휘하던 서울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비롯하여 7명의 군경과 민간인이 북한 무장 공비들에 의해 살해 되었다.

당시 군·경 수색대는 2월 3일까지 31명의 공비 중 1명을 생포하였고 도주한 2명을 제외한 28명을 사살하였다. 생포된 공비 김신조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들의 목적은 1)대통령관저 폭파와 요인 암살 2)주한 미 대사관 폭파와 대사관원살해 3)육군본부 폭파와 고급지휘관 살해 4)서울교도소 폭파 5)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 후 북한간첩 대동 월북 등이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방력 강화와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 창설, 방위산업 공장의 설립을 서둘러 추진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미국 대통령 특사가 2.11 방한하여 양국간 안전보장을 위한 공동성명이 발표되었고 5.27∼28간 워싱턴에서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의가 개최되어 연례화되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북한의 남파 게릴라 침투에 대비하여 군내에 공비전담 특수부대를 편성했고 전방에는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을 구축하였다. 지난해 휴전선 철책 절단사건에 대해 국방부에서 “ㄴ자” 또는 “ㄷ 자” 형으로 절단됐기 때문에 남에서 월북한 흔적이라고 발표한 것은 과거의 경험을 무시하고 너무 성급하게 판정을 내린 것이라고 느껴진다. 특히 월북한 흔적이라고 여겨져도 과거 남파 간첩이나 공작원들이 임무를 마치고 북으로 복귀할 때 휴전선 철망을 통하여 북상하는 예가 많았었는데 무슨 근거에서 ‘민간인’의 월북으로 단정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나는 당시 공비침투사실을 외치며 비아냥과 꾸중을 감수하면서 외롭게 고군분투하여 공비들의 청와대 습격직전에 포착해 외관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함으로써 정확했던 본인의 정보가 사실로 판명되어 박대통령은 경호실 신(申) 비서관(검사)을 나에게 보내어 정확한 정보보고를 치하하면서 금일봉을 하사하고 정보판단의 근거의 설명을 소상히 듣고 청와대로 돌아갔던 일이 있었다. 나는 이와 같은 체험을 영원히 잊지 않고 간직하고자 했었으나 작금의 일련의 정황을 보아 감추고만 있을 수 없어 이 체험기를 쓰게 되었다.


무장괴한의 침투 정보보고


1968년 1월 19일 오후 10시 35분 당직 직원이 급한 정보보가가 있다고 하며 경비전화 수화기를 넘겨주어 받았더니 문산 지역 파견 김 조정관이 무척 다급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첩보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금일 오후 6시 30분 경 이 지역에 거주하는 우(禹)씨 4형제 (각 두 사람은 4촌 간)가 나무하러 인근 야산에 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군인 약 30명과 만났는데 그들이 묻기를 서울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면 검문하는가? 또는 트럭을 타고 가면 검문을 받지 않는가? 라고 캐물었다고 경찰에 신고해 왔습니다. 그 군인들은 누룽지와 미숫가루 같은 것을 먹고 일부는 건빵을 먹고 있었느냐며 국군과 같은 육군 소위 복장에 수류탄을 매어 달고 칼빈 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와 같은 보고를 들으면서 ‘아마도 인근의 수색부대가 훈련 나온 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들었으나 김 조정관의 다음 보고를 듣는 순간 의아심이 일어났다. 그는 말하기를 “사장님, (당시 부하들은 정보지휘관을 “사장”으로 불렀다) 그런데 군인들이 청와대로 가는 도로의 검문상황을 꼬치꼬치 묻고는 청년들에게 ‘마을에 가서 우리들을 만났다는 말을 하면 우리가 훈련하고 돌아올 때 너희들을 몽땅 없애 버리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예사로운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 조정관의 이어진 말에 나는 의자를 차고 화닥닥 일어서면서 본부에 즉시 “괴한출현” 상황보고를 하게 했다.

내가 공비침투의 심증을 굳힌 것은 괴한들이 그곳을 떠나면서 나무꾼 4형제에게 일제 ‘세이코’ 손목시계 하나씩을 선물하였으며 그 중 두 청년은 그들로부터 일제 새 농구화를 얻어 가지고 하산했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이것은 틀림없는 북한 공작원들의 침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김 조정관에게 이런 중요한 첩보를 입수하고서도 왜 이제야 보고하느냐고 힐책했더니 그는 “나무꾼들이 하산해 신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언쟁을 하다가 늦게야 경찰에 신고 했는데 다가 현지 경찰에서 심문하고 군 CIC에서 똑 같은 심문을 하고 다시 미군정보기관과 야전군 사령부 파견 정보요원 등이 돌아가면서 청년들을 불러 다가 조사를 벌이는 통에 시간이 많이 소비되었다고”고 했다. 그러면서 현지 경찰을 빼고는 모든 정보기관이 “괴한들”이 아니고 군부대의 훈련 병력 일 것 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신고내용을 묵살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군부대 훈련이 아니라 무장 공비들이라는 예감이 섬광처럼 나의 머리 속에 뚫고 들어와 예감이 아니라 확신처럼 새겨졌던 것이다. 일전의 일일 정보보고의 회람에 북한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해간 물자 가운데 ‘세이코’ 손목시계 다수와 일제 농구화가 포함되었다는 정보와 함께 일제 농구화의 신 바닥창의 그림이 실렸던 것을 본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무리 우리 군대 장교들이 보급이 풍족하기로서니 훈련 중 만난 나무꾼 네 사람에게 일제 고급시계를 주며 흙도 안 묻은 일제 농구화를 아낌없이 줄 리가 없지 않는가! 그리고 국군부대가 굳이 청와대로 가는 길을 묻고 검문 상황 등을 캐물었다는 점은 단순한 농담으로 흘려 보낼 수 없는 중대 사안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니 모골이 소연해지며 긴장감이 나를 흥분에 떨게 하였다.

나는 괴한들이 그곳에서 출발한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문산 경찰서 서장 윤경감을 부러 깨워 일영면 갈림길에서 만나자고 지시했다. 그리고 인천에서 직원 한 명을 대동하고 나는 출동하였다. 나는 도중에 윤 서장을 만나 간첩들의 통상 침투로인 <문산과 의정부> 사이의 송추 못 미쳐있는 장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제 112 전투경찰중대가 간첩 침투로를 경비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공비 폭풍처럼 달려


송추로 가는 순환도로는 간첩들의 침투경로 이었기에 정부에서 대 간첩 작전 시 기동성 확보를 위해 산간 지방도로를 확장해 포장한 도로이다. 지금은 수도 외곽지역의 순환과 관광을 위하여 요긴하게 활용되고 있는 2급 국도이다. 그날 괴한들의 출현첩보를 받고 순환도로에 이르렀을 때는 전날부터 내린 많은 눈이 산과 들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윤 서장과 내가 제 112 전투경찰중대 앞에 당도하여 보니 정문 양편에 만들어 놓은 방호진지 위에는 경기관총과 AR자동소총을 받쳐 놓은 채로 경찰들은 보이지를 않았다.

나는 내무반에 뛰어들면서 “기상! 기상!”하며 소리를 질렀는데 경찰들은 잠자던 것이 아니라 이미 모두 깨어 있으면서 공포에 질려 모포를 뒤집어 쓴 채로 덜덜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중대장을 부르니 교육 받으러 서울 가서 부 중대장이 대행근무를 하고 있다면서 부 중대장이 나타났다.

그는 나를 보자 와들와들 떨면서도 무척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는 내가 BBS운동 서울연맹 회장을 할 때 불우 청소년 선도와 자활대책 등을 위해 내무부와 접촉하면서 자주 만난 적이 있는 치안본부 소년과에 근무하던 경위인데 어떻게 됐는지 전투경찰로 좌천?되어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 공포 속에서 나를 만났으니 마치 <지옥에서 부처님 만난 것>처럼 기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리라. 그 부 중대장이 차츰 침착을 되찾으면서 다음과 같은 상황보고를 했다.

상부에서 “문산 근방에 괴한출현”이라는 전언통신을 받고 병력을 배치하고 있는데 다시 경찰계통에서 “무장괴한 약 30여명이 서울방향으로 침투할 징후”가 있으니 경계를 강화하라는 재차의 지시를 받고 있는 순간에 중대 초소로부터 약 30m 전방의 부락 샛길로 마치 폭풍이 몰아치듯 한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사람들이 달려가는데 처음에는 나무꾼들 일 것 이라고 언뜻 생각했으나 동네 청년들이 이 밤중에 나무하러 가는 일이 없었는데 하면서 대충 헤아려보니 열명이 넘고 스무 명도 더 넘게 세다 보니 문뜩 “무장괴한 30여명 출현, 서울 방향 침투우려”라는 방금 전의 상부 첩보내용이 떠오르자 그는 비상! 소리를 지르면서 보초와 함께 내무반으로 튀어 들어가는데 그 때 무장괴한 한 명이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의 갈길이 바빠서 너희들을 처치 못하고 간다>고 외쳤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기절할 뻔 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기절 했었을 것이리라) 나는 순간 “내가 30분만 빨리 왔었더라면 병력을 잠복시키고 화망(火網)을 구성하여 그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했을 수 있었을 텐데”하고 분한 마음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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