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수 변호사(80, William P. Min)는 LA코리아타운에서 현직으로 활동하는 최고령 한인 형법전문 변호사이다. 3.1절 94주년을 맞는 지난 1일 저녁 코리아타운 용수산 식당에서 아주 흐믓한 잔치가 열렸다. 바로 민 변호사의 팔순잔치 ‘깜짝 생일 파티’가 열렸다. 그를 따르는 1.5세와 2세들이 마련한 파티였다. 지난 70회 생일잔치부터 1.5세, 2세들이 10년째 계속 준비해오고 있다. 원래 생일은 3월 5일인데 ‘깜짝 파티’를 위해서 일찍 당긴 것이다. 이날 80회 생일 잔치에는 1세, 1.5세 그리고 2세, 3세들 80여명이 모여 힘차게“해피버스데이 !!”를 합창했다. 이자리에 신연성 LA총영사, 차종환 한미교육원장, 서영석 전 한인회장, 강석희 전 어바인시장부부, 케리 케얼리 찰스 호 김 초등학교 교장 등도 자리를 함께했다. 강석희 시장은 하객을 대표해 축하 인사말에서“민 변호사는 우리 시대의 롤-모델이며 코리아타운의 구심체”라며“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어 120세 생일잔치도 이 자리에서 만들자”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이어 민 변호사는 답사를 통해“젊은 세대들과 함께 한 시절이 너무나 좋았다”면서 “그들이 있었기 에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었다”면서“이 몸이 움직일 수가 있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남가주지역에 있는 한인변호사 3천여명중에 세번째 변호사이다. 고 백학준 판사, 고 장병조 판사 등 오직 2명의 선배 변호사에 이어“한인변호사의 대부” 로 든든한 맏형 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이날 2세와 1.5세 그리고 1세들이 지난날 민 변호사님과 함께 활동한 이야기로 덕담을 나누며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잔치가 이어갔으며, 마지막에는 민 변호사 부부도 함께 ‘싸이의 강남 스타일’ 춤까지 추면서 흥겹게 보냈다. 이날 깜짝 생일파티의 주동자(?)는 과거 민 변호사와 함께 미주한인재단LA 그리고 찰스 호 김 초등학교, 김영옥중학교 캠페인과 지난해 한인타운선거구 캠페인 등에 함께 일했던 홍요나(전LA시재개발국홍보담당), 자니 박 사장(카페 맥),알렉스 차 변호사와 지미 차, 알렉스 김 전 주지사 보좌관 등이다. 민 변호사는 지난 2011년에 안구 적출수술로 한 눈을 잃었지만 아직도 일주일에 2-3일 정도는 코리아타운에 자리잡은 에퀴터블 빌딩 사무실에 출근해 법원도 출입하며 노익장을 보여주고 있다. 75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이래 올해로 38년째 현역에서 뛰고 있다. 그에게서는 웬만한 젊은이 못지않은 정열이 넘쳐난다. 또 손자뻘인 2세 젊은이들과도 열린 마음 으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소탈함은 그만의 매력이다. 민 변호사는 지난 37년동안 선배 변호사로서 모범적인 활동을 해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가 커뮤니티 봉사활동에 남다른 정열을 보였으며, 1.5세와 2세들과 함께 봉사를 해와 차세대 젊은이들의 우상이다. 무엇보다 돈을 모르는 변호사로 어려운 한인들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해온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돈보다 인권을 생각한 변호사
그래서 민병수 변호사는 재외동포로는 처음으로 지난 2009년 1월15일 “대한민국 법률대상”을 받았다. 당시 서울 팔레스 호텔에서 열리는 ‘제2회 법률대상’에서 휴식시간에 지금 대통령이 된 박근혜 의원, 김용준 변호사, 깁철수 서울대교수, 이훈규 변호사와 함께 수상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박 대통령과 약 1시간 정도 담화를 나누면서 ‘아 , 여성도 이제는 한국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겠구나’ 라고 신뢰가 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한국의 정치인 중 가장 신뢰가 가는 인물이 박 대통령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민 변호사는 한국인의 오기로 형법 변호사란 꿈을 키우게 된 동기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1960년 포모나의 기독 사립대학인 라번 유니버시티를 졸업했지만, 당시 차별적 정서로는 아시안 학생의 법대 입학이 거의 불가능했다. 웨스트코비나 통합교육구에서 15년간 교사로 일하며 꿈을 접지 않았던 그는 1975년 마침내 주경야독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 당시는 백학준씨가 판사로 임명되고, 이후 판사가 된 장병조씨가 LA에서 개업하고 있던 상황 으로 민 변호사는 캘리포니아주에서 3번째 한인 변호사이다. 변호사가 된 뒤 92년 LA 폭동은 민 변호사에게 한인사회의 권익보호에 더욱 크게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고 한다. 폭동 이후 11명의 한인 변호사들과 함께 한인법률권익재단 (KALAF)을 만들고 사재와 시간을 털어 리커 업주들을 대변해 LA시를 상대로 불합리한 조건부 영업제한(CUP) 조치에 대한 소송을 진행 했었다. 2년이 걸린 소송에서 대부분의 원고는 다 빠져 나갔지만 결국 남아있던 3명의 원고는 승리를 하고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고객의 80%가 한인이었다”는 그는 어려운 한인들을 위해 “적당히 내가 굶지 않을 선에서 수수료 를 받지 않기도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최근 20년은 그에게 변호사란 본업보다는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 일에 더 큰 정열을 불태우어 왔다. 이민 100주년 미주한인의 날(코리안-아메리칸 데이) 추진위원장을 지내며 LA시와 가주에서 ‘미주 한인의 날’을 제정하는데 앞장서기도 한 그는 특히 1.5세, 2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끝없는 한인사회에 대한 정열과 봉사
민 변호사가 요즘 바짝 커뮤니티 일에 매달리는 것은 그 자신이 미주한인 이민사의 한 밀알이기 때문이다. 사실 민 변호사의 한인 청소년 및 2세들을 위한 활동은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됐었다. 1960년대 2세들로 구성된 당시의 한인회(AKCO)를 시작으로, 1970년대 제인 김씨가 설립한 한인타운 청소년회관 (KYCC)에도 관여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인 단체와 함께 해왔다. 당시에도 자신이 올드타이머 1.5세로서 이민 1세들과 일하면서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난 2003년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이 끝나고 커뮤니티에 봉사정신과 애정을 가진 1.5세, 2세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의 지표도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한인 이름 최초의 초등학교 “‘찰스 H. 김 초등학교’와 중학교인 ‘김영옥중학교’의 명명 작업을 추진하면서 이들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민 변호사 자신이었지만, 타인종 커뮤니티 및 단체들을 제치고 이 이름이 선정되도록 치밀한 준비와 전략을 준비한 사람들은 1.5세, 2세였다는 것이다. 민 변호사는 “1.5세, 2세들은 순수하면서도 유능하고 특히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이 많다”면서 “이를 1세가 인정하고 도와주면 큰일을 할 수 있고, 이들과 일하는 것이 요즘 내가 사는 기쁨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1년에 수백명씩 쏟아져 나오는 후배 변호사들에 대해“인구에 비례해 1.5세와 1세가 이렇게 많이 진출한 것은 한인 커뮤니티밖에 없다”면서“변호사가 많아지면 문제가 있을 때 법적 으로 이를 대변할 인력이 많다는 뜻”이라며 긍정적인 시각도 보였다.
언제나 늘 약자의 편에 선 변호사
민변호사가 이제까지 맡은 법률상담 건수는 7천건이 넘는다. 그중 90%가 한인 고객이다. 가슴아픈 사연도 많고 잊을 수 없는 사건도 많다. 자는 남편에게 끓는 기름을 부은 사건, 총격으로 며느리 목숨을 앗은 시아버지 사건(과실치사), 모래시계파 관련 아이칸 살인사건(무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변호사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외국인 케이스로 항소법원 인권보호법 판례로 남은 소송건이다. 남의 아파트에 문을 열어놓은 채 들어가 도둑질을 하고 있는 사람을 지나가던 경찰이 들어가서 체포했다. 경찰은 남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밖에서 ‘경찰’이라고 알리고 들어갔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민변호사가 변호를 맡았던 항소법원에서 이 사건은 승소했다. 그는 변호사가 되면서 자신과 한 약속이 있었다. 한인이 한인을 고소하는 것은 맡지 않겠다는 것과 돈을 버는 것보다 사람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자는 것이었다. 변호사 생활 35년 동안 그는 이 약속을 지켜왔다고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일수록 돈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가리켜 ‘돈 없는 변호사’라고 했다. 그는 한미변호사협회 제3대 회장 시절에 센트럴 라이온스 클럽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무료 법률상담을 시작했다. 오늘날 까지 이 상담은 이어져 오고 있다.
민 변호사는 한국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의 꿈이 변호사였다. 그러나 미국에 와보니 영어가 딸릴 뿐만 아니라 그 때만 해도 동양인이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면 ‘웃긴다’는 비웃음밖에 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일단 변호사의 꿈을 접었었다고 한다. 라번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웨스트 코비나 통합교육국 교사로 재직하면서 글렌데일 유니버시티 (직장인을 위한 법대)에서 법률공부를 해 1975년 변호사가 됐다. 미국의 재판은 변호사가 변론을 해서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설득시켜야하는데 민 변호사는 15년 동안 교직에 있었던게 큰 도움이 됐다. 일반적으로 배심원들을 대상으로 이야기할 때 7, 8학년 정도 수준으로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단에서 가르칠 때 어떻게든 학생들이 이해하고 따라 주도록 이야기하는 법을 터득한게 법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많은 한인 변호사들이 실제로 법정에 나가 변론으로 검사나 상대편 변호사들과 논쟁을 자유롭게 벌이는 변호사는 드물다. 10대 소년의 몸으로 조국을 떠나 60년 이상 미국생활을 하고 8순을 지내고 있는 특이한 인생길을 돌아보는 그의 시선은 따스하다.
특이한 인생길, 조국에 대한 그리움
젊었을 때는 조국에 남아있는 친구들한데 미안한 생각이 많이들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한국전에 나가 목숨을 잃거나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와서 남 안하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 볼 때 이땅에서 한인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을 보면 미국생활은 하나님께서 준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클래식 음악과 독서를 좋아한다. 특히 바이올린 콘첼토를 좋아한다. 주말에는 일거리를 싸갖고 집에 들어가 일도 하고 부인 캐롤과 함께 외식도 하며 조깅도 한다. 슬하에 크리스토퍼(덕기 29)와 티모시(선기 24) 두 아들이 있다. 그는 부친을 따라 10대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간다는 것이 한편으로 흥분이 되긴 하면서도 또 한편 으론 살던 집과 친구들을 두고 떠난다는게 서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1948년 당시 인천 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데 배에 올라타면서 소년은 부둣가 흙 한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라도 조국의 것과 가까이 있지 않는다면 허전하고 외로워 못견딜 것 같았기 때문이다. LA에 도착해서는 그 흙을 봉투에 넣어 보관했었는데 대학에 진학하고 변호사로 바쁘게 지나면서 흐지 부지 없어지고 말았다. 그에게도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이제는 80 노년에서 그 때 조국의 흙이 이 나라 어딘가에 떨어져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래도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많이 달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