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미주 동양인사회의 최대 인권운동으로 알려진 ‘이철수 사건’의 주인공 이철수씨 (1952-2014)가 지난달 18일 위장 이상으로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 병원에 입원한 뒤 의사의 수술 권유를 거부하고 2일 새벽 4시께 삶을 마감했다. 이씨의 장례식은 9일 북가주 여래사에서 ‘이철수 사건’을 처음 보도했던 이경원 원로기자를 포함해 ‘이철수 구명운동’에 ‘잔다크’였던 일본계 랑꼬 야마다 변호사 등을 포함 많은 아시아계 인사들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이씨는 나이 19세때 샌프란시스코에서 1973년 억울하게 체포되어 물증도 없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백인 우월주의자의 공격에 대해 정당방위 살인으로 사형언도로 죽을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계 소녀 랑꼬 야마다는 이씨의 무죄를 믿었다. 랑꼬 야마다의 간청에 6개월간 이씨 사건을 취재한 이경원 원로기자는 1978년 1월 29일 새크라멘토 유니언 지에 ‘이철수의 무죄’를 특집으로 보도했다. 이후 미전국적으로 ‘이철수 구명운동’이 일어나 끝내 1983년 3월28일 이철수씨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신체적으로 화상도 입는등 정신적으로도 편하지 못했다. 항상 자신의 구명을 도와준 한인들과 아시안, 백인들에 대한 보답을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이철수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마련한 북가주의 한인 사찰 여래사는 이씨와는 여러모로 인연이 깊다. 이씨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사찰이었고, 그 사찰의 많은 불자들이 이씨 구명에 헌신했다. 이씨가 83년 일단 보석으로 석방될 당시 보석금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 때 서슴없이 사찰을 담보로 보석금을 냈던 사찰이다. 그래서 이씨에게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이 자리에서 이경원 원로기자는 “(이씨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 정의롭고 자유롭다는 나라에서 이철수는 100번도 넘게 죽임을 당했다”며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인종차별을 비롯한 부당한 차별 행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분노가 끓어오른다”고 안타까워했다. 랑꼬 야마다 변호사는 이철수 사건에 뛰어 들면서 전공을 바꿔 변호사가 되었다. 40년전 1973년 처음 이씨의 사건에 접하고 변호사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으나, 그녀가 생각한 변호사들은 아니었다. 이씨 구명운동에 참여했던 한인 젊은이들도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정의운동에 눈을 떠 변호사, 정치인이 되었다. 그 중에는 현재 코리아타운에서 법률사무소를 내고 있는 던컨 이 변호사를 포함해, 데니스 김 변호사, 케네스 이 변호사, 추숙남 변호사, 심영식 변호사들이 있다. LA에서 젊은 시절 이철수 구명운동에 나섰던 일본계 월렌 후루타니씨는 이 운동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해 끝내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정의의 투쟁은 계속 ‘이철수 사건’은 미국 역사에서나 한인이민사에서도 크나큰 교훈을 남겼다.
‘이철수 사건’ 이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이민자 학생들이 100명을 넘는 공립학교에서는 반듯이 이중언어교사를 채용해야 한다는 조례가 제정됐다. 오늘날 여러학교에서 한인학생들을 위한 이중언어 교사가 근무하게 된 것도 다 ‘이철수 사건’의 영향이다. 이날 UC데이비스의 리처드 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포럼에서 ‘이철수 사건’의 주인공 이철수씨는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면서 “젊은 세대들이 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씨는 “지난날 나의 무죄를 위해 한인은 물론 일본인, 필리핀, 흑인 등이 연대해 구명위원회를 결성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자신의 집에서 처음 이철수 후원회를 결성했던 그레이스 김 전KAC고문은 “이경원원로기자의 기사가 우리들 마음을 움직였다”면서 “인종을 초월한 후원회가 결국 정의를 쟁취하였다”고 말했다. |
‘이철수 사건’주인공‘이철수’ … ‘恨많은 세상 끝내 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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