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월남 비화 특종 발굴]38년만에 밝혀진 월남억류 한국외교관 충격적 ‘북한전향서’ 진실과 사실

■ 억류 서병호총경 ‘간첩 대량 남파해 적화통일하라’ 전향서 작성

■ 전향서 말미 ‘적화통일방법론’제시 자유민주주의체제 전면 부인

■ ‘혁명 방해하지 말고 박 정권 부정’ 北 요구에 방법론까지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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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송환 극도의 불안감 속 전향서 작성한 서병호 총경

대남적화통일방법론까지 제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면 부정

월남패망

▲ 월남패망의 모습. 사이공에 입성한 공산반군(월맹군) 탱크가 월남의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을 접수하고 있다.

월남패망당시 베트남에 억류됐던 한국외교관 3명중 1978년 북한으로의 전향서를 작성, 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졌다. 1명의 외교관은 당시 박정희정권을 부정하는 내용의 자술서를 작성했지만 1명의 외교관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하고 공산체제에 동조하는 전향서를 쓴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간첩을 대량 남파해 적화통일을 하라’는 내용의 전향서는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 충격적 전향서를 쓴 인물은 당시 내무부에서 파견됐던 서병호 총경이었으며 이는 서총경 자신이 한국정부에 제출한 경위서를 통해 38년만에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는 지난해 본보가 보도한 공로명 전 외무장관이 1978년 주한미대사관에 ‘외교관 1명이 전향했음이 명백하다’고 통보했다는 주한미대사의 비밀전문과 일치한다. 서총경은 북한에 강제납북될 경우 자결하겠다. 전향서가 극한상황에서 작성됐음을 참작해 달라고 밝혔다. ‘적화통일’방법까지 제시하며 ‘반체제-반국가’의 전향서를 쓴 서총경은 이날밤 감방의 벽을 치면서 통곡하고 후회했다고 밝혔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이 같은 행위를 어느 선까지 수용하고 용서할 지는 의문이다. 베트남 억류외교관들이 직접 작성한 경위서를 통해 전향서 내용 등을 살펴보고 그 행위에 대한 평가는 국민들에게 맡긴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 이대용 주월공사

▲ 이대용 주월공사

지난 1975년 4월 30일 월남패망당시 베트남을 탈출하지 못했던 한국 외교관은 모두 9명, 이대용공사, 이규수참사관, 김창근서기관, 김경준 2등서기관, 서병호 아타세, 안희완 2등서기관, 신상범 3등서기관, 김교량 통신사, 양종렬 통신사보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중 김창근 서기관은 자결을 결심하고 배를 구해서 싱가폴로 탈출했고, 이규수 참사관등 5명은 베트남 억류 약 1년만인 1976년 5월 7일 월맹정부의 출국허가를 받고 사이공을 출발, 5월9일 서울에 도착했다. 문제는 나머지 3명이었다.
이대용공사, 안희완 2등서기관, 서병호 아타세등 3명은 출국허가는 고사하고 월맹정부의 혁명사업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치화형무소에 수감됐다. 3명 모두 국가안보관련분야 종사자였다. 이대용공사는 경제담당공사였지만 중앙정보부 소속이었고 안희완 2등서기관역시 중앙정보부소속으로 이공사의 보좌역이었다. 또 서병호 아타세는 내무부산하 치안본부소속의 현직 총경이었다.

치안본부 소속 서영사 강제송환 대비 전향서

월남패망 당시 탈출하지 못한 외교관들과 한국교민 등 150여명은 이대용 공사의 지휘아래 주월한국대사관등에 한데 모여서 기거하며 호시탐탐 탈출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월맹정부는 1개월여만인 1975년 6월 18일 안희완 2등서기관과 서병호 주재관을 체포했고, 월맹정부의 유엔가입이 실패하자 1975년 10월 3일 이대용공사를 전격 체포했다.
이들은 모두 경비와 통제가 가장 삼엄한 치화형무소에 수감됐다. 외무부 비밀전문에 따르면 월맹정부의 협조아래 북한공작원들이 1975년 9월 23일 안희완 2등서기관을, 1975년 9월 22일과 23일 이틀에 걸쳐 서병호주재관을 각각 심문했고, 월맹정부관계자가 10월 10일 이대용공사를 70분간 직접 심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 서병호총경의 1978년 10월 4일 진술서 -마지막 희망란에 본인은 ‘간첩을 대량 남파, 혼란을 조성하고 결정적 시기를 만들어 적화통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글을 썼다고 기재

▲ 서병호총경의 1978년 10월 4일 진술서 -마지막 희망란에 본인은 ‘간첩을 대량 남파, 혼란을 조성하고 결정적 시기를 만들어 적화통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요지의 글을 썼다고 기재

이때까지도 이들 외교관들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될 가능성은 희박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9월 23일 북한공작원 3명은 안서기관을 대상으로 가족상황과 인적상황 등을 물었고, 중앙정보부 소식이냐고 다그쳤다. 북한공작원들은 사전에 질문리스트를 작성, 심문했고, 이는 월맹측이 북한공작원들의 심문시간을 엄격히 제한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됐다. 안영사는 부인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날 북한의 심문내용을 설명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족상황, 경력, 학력, 친척관계, 부인경력, 안영사 부친의 친구관계 등을 문의했고, 이공사가 6.25에 참전한 육군준장이냐고 묻기에 ‘아니다’라고 답하고, 자신도 중앙정보부가 아닌 외무부소속이라고 답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서병호주재관도 9월 22일과 23일 2일간 약 30분간 북한측의 심문을 받았고, 이공사는 10월10일 70분간 월남관계관으로 부터 심문을 받은뒤, ‘북한으로의 강제송환은 없을 것으로 보임’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당장 북한으로의 강제송환을 없었지만 치화교도소 내 처우는 갈수록 열악해 지고 쥐똥이 섞인 하루 2끼의 식사가 고작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1976년 8월 20일 이순홍 베트남교민회장과 서병호주재관의 면회가 이뤄졌다. 그리고 이회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교도소 내 간수들을 포섭, 서신교환을 시작하고 교도소 내에 음식과 약품 등을 차입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서주재관에 이어 안영사와의 면회는 또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977년 2월 15일에야 이뤄졌지만 이공사에 대한 면회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이공사에게는 간수를 통해 물건차입과 서신교환 등은 가능했지만 면회는 막았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3명은 각각 다른 방에 수용돼 있었지만 1977년 12월 마침내 3명이 같은 방에 수감되면서 ‘혹시나 석방되려나 보다’라는 기대를 가지게 됐다. 각각 다른 방에, 때로는 독방에 수용돼 있을 때보다는 심리적으로 훨씬 안정됐다. 이공사 지시 하에 서로를 격려하며 혹독한 수감생활을 이겨 냈던 것이다.

석방 기대 무너지자 간첩 대량남파 방법론 제시

그러나 곧 석방되리라는 기대는 9월 25일 다시 3명 모두가 각각 다른 방에 격리, 수감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불안감이 엄습했고 바로 그날부터 북한의 억압적이고 집요한 포섭공작이 진행됐다. 협박과 회유, 강온양면 전략이었다. 무엇보다도 북한은 이들 외교관 3명을 모두 북한으로 데려가 평양시민 환영대회장에 세우면서 공산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격리시키고 심문을 시작한 것이다.

▲ 서병호총경의 1978년 10월 4일 진술서 - 한반도에 전쟁이 곧 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고, 본인 자술서를 중정에 보내오면 극한 상황을 참작해서 읽어주기 바람 이라고 명시.

▲ 서병호총경의 1978년 10월 4일 진술서 – 한반도에 전쟁이 곧 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고, 본인 자술서를 중정에 보내오면 극한 상황을 참작해서 읽어주기 바람 이라고 명시.

이 심문결과는 이순홍 베트남교민회장이 구축했던 비밀연락선을 통해 한국정부로 전달됐다. 이공사와 안영사는 10월 3일자로, 서주재관은 10월 4일자로 각각 심문내용 등에 대한 경위서를 작성했고, 이 서한은 이회장이 치화형무소 간수를 통해 입수해, 주사이공 프랑스총영사관에 전달, 한국정부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주사이공 프랑스 총영사관은 파우치편으로 프랑스정부로 보냈고 프랑스정부가 주프랑스한국대사에게 전달, 마침내 10월 28일 한국 외무부가 이 경위서를 접수한 뒤 10월 30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앞서 이회장은 간수를 통해 심문사실을 알고 경위서 입수전인 10월 12일 주싱가폴한국 대사관에 국제전화를 걸어 이공사 등이 북한심문을 받고 있다고 미리 알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공사가 작성한 경위서는 8페이지, 안영사가 작성한 경위서는 20페이지, 서주재관이 작성한 경위서는 10페이지로 확인됐으며 서주재관이 작성한 경위서가 충격적 내용을 담고 있음이 드러났다. 안영사는 9월 26일과 27일, 서주재관은 9월 25일과 26일, 28일과 29일, 10월 2일등 5차례에 걸쳐 박영수등 북한측 요원 3명의 심문을 받았고 이공사도 9월 25일과 29일, 30일. 10월 1일과 2일 심문을 받으며 북한측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박영수는 남북회담 때 남한 불바다발언을 했던 바로 그 자다.

서병호주재관은 ‘외무부장관귀하’로 시작하는 지난 1978년10월 4일자 서신을 통해 당초 북한이 당초 ‘남한인민의 한사람으로서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지합니다. 나는 인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라는 전향서를 쓰라고 강요했고, 서총경 자신은 ‘한국국민의 한사람으로서 평화적으로 조국이 통일될 것을 바랍니다. 나는 국민을 위해 일하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전쟁이 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자술서를 쓰서 북한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서총경은 그 뒤 ‘나는 민족을 배반하지 않고 통일을 반대하지 않으며 양심에 따라 살 것을 서약함, 서병호’ 라는 자술서를 다시 작성해 북한측에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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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총경, 뒤늦게 북한 전향서 작성 사실 드러나자 …

  ‘전쟁발발 막기 위해 적화통일하라고 썼다’

반국가 자유민주주의체제 자체 부정 충격적 내용

그러나 서총경은 이 서신 맨 마지막인 9페이지와 10페이지에서 놀라운 내용을 진술하고 있다. 자신이 북한측에 자술서를 써주면서 마지막 희망란에 ‘지금 한반도에 전쟁이 나면 6.25 몇10배의 피해를 입으니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간첩을 대량 남파, 혼란을 조성하고 결정적 시기를 만들어 적화통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요지의 글을 썼다고 밝혔다. 이는 ‘간첩을 대량 남파해 적화통일을 하라’는 적화통일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적화통일은 한국을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반국가 – 반체제적 주장이다. 대한민국 치안본부소속 현직 경찰이 북한에 써 준 전향서는 이처럼 충격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당시 공로명 외무부 아주국장이 주한미국측에 통보한 내용에 따르면 북한측이 전향서에 포함시키도록 요구한 것은 첫째 남한 내 애국세력들의 혁명과업수행을 방해하지 말 것, 둘째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철회 등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서총경이 ‘간첩남파, 적화통일’ 운운한 것은 북한측 기본요구를 훨씬 넘은 내용이다.

서총경은 이 서신에서 ‘그 당시 본인은 1975년4월초에 김일성의 성명[월남은 이제 통일되었으니 한반도의 현 분단상태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이 라디오 방송된 것을 잊을 수 없었음. 자술서 쓰던 날 만난 북한의 호전적인 태도는 본인으로 하여금 ‘한반도에 전쟁이 곧 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심각한 의구심을 갖게 했음’이라고 전향서를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즉 전쟁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간첩을 남파해 적화통일 하라고 썼다는 것이다. 서총경 자신이 밝혔듯 공란으로 남겨도 되는 전향서 희망란에 굳이 자신의 희망이라며 적화통일방법론을 기재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비판을 낳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서총경은 ‘북한이 본인의 자술서를 중정에 보내오면 그 당시 본인이 처했던 극한 상황을 참작해서 읽어주기 바람, 앞으로 만약 납북되면 자결하겠음’ 1978년 10월4일밤 서병호올림’이라고 보고를 끝맺고 있다. 적화통일 운운하는 전향서는 북한의 위협등 극한 상황에서 쓰게 됐다. 정상참작을 해달라. 이런 말이다. 과연 그 극한 상황의 북한측 협박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서총경본인이 체감했던 심리적 압박의 강도가 어떠했는지는 서총경 본인이외에는 알기 힘들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을 인정하더라도 과연 그 같은 행위가 정당했는지는 많은 논란을 낳을 수 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자술서 쓴 후 뒤늦게 땅을 치며 후회 대성통곡

▲ 안희완 2등서기관의 1978년 10월3일 진술서 - ‘박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 안희완 2등서기관의 1978년 10월3일 진술서 – ‘박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서총경은 이 같은 ‘각서’[서총경 표현]에 대해 경솔하게도 깊이 생각지 않았다며, 그 각서가 대남방송에 이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리에 떠올라 감방벽을 치면서 후회했다’고 밝혔다. 대성통곡하며 후회했다는 것이다. 이때 이공사가 간수를 통해 쪽지를 보내왔다. 이공사는 ‘북한요원을 만나 함구불언했더니 북한이 화를 내어 때리려고해서 맞섰으며 시종 묵비권 행사를 했으니 용기를 내어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라’는 것으로, 자신의 심문사항과 저항내용을 적어서 보냈던 것이다. 서총경은 이를 보고 각서내용을 이공사에게 보고했다고 밝혔고 이공사는 ‘귀국하면 잘 말할 터이니 조금도 걱정말라’는 쪽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공사는 일단 서총경이 북한에 전향해 평양으로 가는 최악의 경우를 막기 위해, 서총경에게 아무 문제없다며 달래기 위해 그 같은 쪽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안희완 2등서기관도 ‘존경하는 박대통령 각하’로 시작되는 서신을 10월 3일 작성했으며, 안영사 역시 북한측에 박정희정권을 부정하는 자술서를 써준 것으로 확인됐다. 안영사는 자신의 서신 20페이지, 마지막장에 북한요원의 강요에 따라 소직은 그들에게 ‘선량한 국민으로 살 것이며 평화통일을 방해하지 않고 박정권을 지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한바 있다고 밝혔다. 박정권, 즉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술서를 써준 것이다.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다는 것은 정권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서총경은 적화통일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즉 반국가-반체제를 뚜렷이 한 반면 안영사는 국가나 체제를 부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정권담당자인 박정희 정권을 부정한 것으로, 국가나 체제안에서 위정자에 대한 반대를 표했다는 점에서 서총경의 전향서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공교롭게도 안희완 영사와 서병호 총경, 두 명의 외교관 모두 북한에 서약서를 제출했지만, 서총경은 반국가-반체제를 천명하고 대한민국을 부정한 반면 안영사는 박정희정권에 반대하지만 대한민국체제를 인정했던 셈이다. 따라서 외무부가 1명이 전향했다고 미국측에 통보할 때 과연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 추측이 가능하다.

북한 전향 막기 위해 ‘북괴항거-완강저항’ 서신 교환

특히 안영사는 이 서신에서 이공사가 자신의 부하들이 북한에 강요에 못 이겨 전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음을 적고 있다. 안영사는 이공사와 서총경이 북한의 심문을 받은 9월 25일 밤, 이공사 감방과 소생방 거리가 약 150미터에서 2백미터인데 이공사가 전지불 밑에서 흰옷을 가지고 소생에게 글써서 신호하기를 ‘북괴항거’라는 신호를 보냈고, 9월 26일 밤에도 같은 방법으로 ‘완강저항’이라는 신호를 세 차례나 보낸 뒤 다시 두 차례 ‘북괴저항’이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밝혔다.

▲ 이대용공사의 1978년 10월 3일 진술서 -적극 항거하고 있으나 힘이 미약, 만약 납북되면 자결할 각오임, 자결시 과거 본직의 유언을 실천 바람.

▲ 이대용공사의 1978년 10월 3일 진술서 -적극 항거하고 있으나 힘이 미약, 만약 납북되면 자결할 각오임, 자결시 과거 본직의 유언을 실천 바람.

또 이공사는 30일 북한측 심문을 받은 다음, 의미심장한 신호를 보냈다. 마치 마지막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듯한 신호였다. 이날 밤 이공사는 ‘북괴대비’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안영사는 ‘지난 3일간 첫날에는 ‘북괴항거’, 그 다음날은 ‘저항’, 오늘은 ‘대비’로 그 신호가 달라지고 있어 소직은 불안한 상태’라고 적고 있다. 특히 10월 1일 아침 5시경 ‘긴급상보’ 즉 빨리 상세히 심문내용을 보고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그날 밤 8시 절망적 지침이 하달됐다. 이공사가 안영사에게 ‘북송대비’라는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8시간 뒤인 10월3일 새벽4시 ‘보고 유엔개입’이라는 신호를 보냈고 북송대비 신호는 없었다. 밤사이에 이공사가 간수를 통해 바깥소식을 접했던 것이고, 한국측이 유엔 등을 움직여 유엔이 적극 개입하고 있으니 버티라는 한국정부의 지시로 추측된다. 이처럼 이공사는 단 한명의 외교관이라도 북한에 끌려가거나 자진 월북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온갖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 부하들을 안심시킨 것이다.

이공사도 10월 3일자로 ‘수신 외무부장관’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공사는 이 서신에서 ‘이 전문보고는 극도의 보안상 본직이 한글로 작성하고 우리가 영문번역하여 불란서를 통해 보고케 함을 양해바람’이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이순홍 교민회장의 암호명이다. 외무부 문서에 따르면 의장은 외무부장관, 부석은 이대용공사, 부명진은 안희완영사, 부정관은 서병호주재관, 석명관은 억류공관원 3인을 총칭하고, 우리는 이순홍회장, 우마는 이순홍회장과 함께 억류 외교관들의 옥바라지를 주선했던 월남여성 마이여사를 뜻하는 암호다. 이공사는 ‘사태는 매우 심각함, 본직이하 모두 적극 항거하고 있으나 옥중의 몸, 그 힘이 극히 미약함, 만일의 경우 본직의 북한행이 납북, 허위망명서작성, 타의망명 등으로 이뤄질 때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각오를 굳게 하고 있음, 이렇게 될 시 과거 본직의 유언을 실천 바람’이라며 최후의 각오를 밝히고 있다. 본직의 유언, 즉 이공사의 유언은 월남탈출에 실패한뒤 대사관에 머물면서 다른 외교관에게 밝힌 것으로 ‘나는 북한으로 끌려가면 자결할 것이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께 자녀들이 대학공부만 마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드려달라’는 것이었다.

외교관 3명 서신 접수 미국측에 측면지원 요청

이처럼 1978년 10월 28일 베트남 억류외교관 3명으로 부터 북한의 심문상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된 한국정부는 발칵 뒤집어진다. 이미 지난해 본보가 보도한 것처럼 공로명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은 그로부터 4일 뒤인 11월 2일 주한미국대사관에 ‘외교관중 1명이 전향서에 서명했음이 명백하다’고 통보하게 된다. 공국장의 통보는 외교전문을 통해 앞뒤를 맞춰보니 10월 28일 외교관 3명의 서신을 접수, 내용을 파악한 뒤 전향을 확신한데 따른 것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미국측에 통보하고 미국측의 측면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이공사가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직후 처음으로 정부 훈령을 받게 된 날도 11월 2일이다.

▲ 1978년 11월 2일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고한 ‘베트남 억류 한국외교관-뉴델리협상’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서울9861] - 공로명아주국장이 베트남 억류 외교관 3명중 1명이 전향서에 서명했음이 명백하다고 통보했다고 적고 있다. 북한은 전향서에 남한내 애국세력의 혁명적 활동을 방해하지 말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철회등을 담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 1978년 11월 2일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보고한 ‘베트남 억류 한국외교관-뉴델리협상’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서울9861] – 공로명아주국장이 베트남 억류 외교관 3명중 1명이 전향서에 서명했음이 명백하다고 통보했다고 적고 있다. 북한은 전향서에 남한내 애국세력의 혁명적 활동을 방해하지 말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철회등을 담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또한 한국정부가 3명의 서신을 통해 상황을 파악한뒤 한명이라도 북한으로 망명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한 긴급처방이었다. 이공사는 2010년 5월 출판한 자신의 저서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에서 11월 2일 처음으로 한국정부훈령을 받았다며 그 내용을 설명했다. ‘놀랍게도 1978년 11월 2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우리 외무부 장관 훈령이 나에게 하달되었다. 옥중에서 처음 받는 본국훈령이었다. 1. 현재 한국대표단, 월공대표단, 북괴대표단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이공사, 서영사, 안영사의 석방을 위해 3자회담을 하고 있음. 2. 억류되어 있는 한국외교관 세 명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임. 3. 북괴요원들의 어떠한 협박, 공갈에도 겁내지 말고 북한에 가겠다고 동의하지 말 것’ 이라고 적고 있다. 즉, 3자회담이 진행 중이니 북한에 강제 납치되지 않으며 북한의 협박공갈에 넘어가서 북한행에 동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곧 석방되니 협박에 굴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는 내용이다. 그만큼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외무부 비밀전문을 통해 공로명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이 미국측에 통보했던 북한에 전향서를 쓴 베트남 억류외교관 1명이 과연 누구인지가 38년만에 밝혀졌다. 억류 외교관 3명중 2명이 북한측에 동조하는 둣한 서류를 작성했고, 특히 한명은 적화통일방법론까지 제시하는 듯한 충격적 내용의 전향서를 북한측에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이므로 국민을 위하는 반면, 위정자, 즉 정권에 반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외무부는 ‘억류외교관 3명중 1명이 북한에 전향서를 썼음이 명백하다’고 미국에 통보한 것으로 추측된다. 억류외교관 3명은 5년간의 옥고 끝에 1980년 4월 자유대한의 품으로 돌아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물론 1명이 전향서를 썼다는 사실은 전혀 국민에게 알리지 않은 채. 하지만 진실은 땅에 파묻어도 스스로 그 싹을 드러낸다.

38년만에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지금, 과연 그 같은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 우리 국민이 수용할 수 있는 정도인지를 이제 판단해야 한다. 판단은 바로 국민의 몫이다. 다만 그 누구도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수감과 심문당시 고통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준엄하고 냉철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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