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발견 콜럼버스’에서부터 ‘배우 존 웨인’까지…
끌어 내리고…
발로 짖밟고…
때려 부수고…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을 계기로 촉발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미국에서 확산 되면서 인종차별의 기념이나 상징물들이 속속 퇴출 대상이 되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는 미국 뿐만 아니라 과거 노예제를 했던 영국 프랑스 등 유럽으로도 번져가고 있다. 오늘의 영웅이 기피인물로 되어가고 있다. 이번 퇴출운동은 역사적 인물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이나 편견에 관련된 기념물이나 상징물 등, 영화 예술과 유튜브에 까지 파급되고 있다. 앞으로 인종차별에 관한 서적들도 “금지도서”로 지정될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 <성진 취재부 기자>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진 콜럼버스가 일차 타깃이 되었다. 지난달 10일 이번 흑인 폭동 발원지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의 주의회 의사당 주변에 모인 시위대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을 끌어내린 뒤 시위대들이 동상을 짓밟기까지 했다고 AP 통신은 보도했다. 또한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 포스트(WP)등에 따르면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는 전날 밤 콜럼버스 동상이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파손된 채 발견됐다. 동상의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파손된 조각은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보스턴 시는 1979년 세워진 이 동상을 철거하고 다시 복구할지를 논의해 보겠다고 밝혔다. 마티 월시 시장은 “그동안 콜럼버스 동상은 반복적으로 공격을 받아왔다”며 “현재 진행 상황 등을 고려해 콜럼버스 동상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평가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신대륙을 발견한 개척자로서 존경을 담아 그의 동상과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 미국 곳곳에 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먼저 살고 있던 원주민을 탄압하고 학살했다는 역사적 평가가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도 1927년 세워진 콜럼버스 동상이 훼손됐다. 아메리칸 원주민의 인권을 옹호하는 1000여명의 시위대는 전날 리치먼드 도심 공원에서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고, 흥분한 시위대 10여명이 콜럼버스 동상을 끌어내려 인근 호수에 쳐박았다. 시위에 참여한 리치먼드 원주민 협회는 “우리는 경찰 폭력에 지친 흑인 사회와 아시아계 주민과 연대하고 있다”며 “콜럼버스 동상을 호수로 내던진 것은 매우 적절한 조치”라고 말했다.
시위대는 “이 땅은 원주민의 땅”, “콜럼버스는 집단 학살자”는 손팻말을 들었다. 랠프 노덤 버지니아 주지사는 훼손된 콜럼버스 동상을 창고에 보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몇년 전부터 미국에서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는 국경일인 ‘콜럼버스 데이’(10월의 두 번째 월요일)를 ‘원주민의 날’로 대체하자는 여론이 높아졌고, 콜럼버스 동상이 훼손되는 일도 점점 자주 발생했다. 지난해 콜럼버스 데이에는 캘리포니아와 로드아일랜드 주의 몇몇 도시에 세워진 콜럼버스 동상이 빨간 페인트로 칠해지기도 했다. 한편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남부연합의 인물들과 기념물 상징물 등이 집중적으로 퇴출 대상이 되고 있다. 남부연합은 1861년 노예제를 고수하며 합중국을 탈퇴한 미국 남부지역 11개 주가 결성한 국가로, 이로 인해 미국은 남북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었고 결국 북부가 승리했다.
“콜럼버스는 원주민 학살자” 동상 훼손
미국의 노예 해방일(6월 19일)을 하루 앞둔 18일 미 국회의사당에서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를 옹호했던 남부연합 관계자들의 초상화가 철거됐다. 앞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하원의 서기를 맡고 있는 셰릴 존슨 하원의원에게 서한을 보내 “미 국회의사당은 민주주의의 심장부”라며 “국회의사당 어디에서도 남부연합의 편협함과 인종차별주의를 추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역대 미 하원의장 초상화는 국회의사당에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곳에 걸려 있었다. 한
편 18일 미 상원에서는 남부연합에 가담했던 인물들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법안이 상정됐다. 그러나 법안을 추가로 검토할 필요가 있고, 이미 미국의 각 주에서 동상 철거를 하고 있다는 의견이 나와 법안 처리가 되지는 않았다. 노예 해방일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이 있은지 2년 만에 텍사스에 마지막으로 전해진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미 연방의 공휴일은 아니지만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최근 미 기업들 중에서는 자체적으로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유급휴가를 주는 경우가 늘었다. 또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의사당의 동상 전시관에서 남부연합 관련 동상 11개를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펠로시 의장은 이들 동상 배치를 감독하는 관련 위원회에 보낸 서한에서 “의사당은 바로 우리 민주주의의 심장이다. 조각상은 최고의 이상을 구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펠로시 의장은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시절이던 2017년에도 이들 동상 제거를 요구한 바 있다. 이 전시관에는 주별로 2개씩 의뢰한 동상 100개가 있는데, 이 중 11개가 남부 연합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엔 남부연합의 대통령과 부통령을 지낸 제퍼슨 데이비스와 알렉산더 스티븐스도 포함돼 있다.
현재 육군에는 남부연합 장군의 이름을 딴 기지가 10개 존재하고 그간에도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의 잔재라는 비판론 속에 기지 명칭 문제가 다뤄졌지만 변경되진 못했다. 남부연합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의 이름을 딴 기지를 비롯해 존벨 후드, A.P. 힐, 브랙스톤 브랙 등 남부연합에서 활약한 장군들의 이름이 기지명에 들어가 있다. 그동안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인식돼왔다. 그동안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수년전부터 있었지만 미 국방부는 지난 2월까지만 해도 기지명 변경 계획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 해왔다. 육군은 당시 성명에서 “옛 북부 연방과 남부연합 총사령관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을 따 시설물과 거리를 명명하는 전통이 있다”고 강조했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과 라이언 매카시 육군장관이 최근 기지 명칭 변경에 열려 있다고 밝히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검토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한 가운데 군사위의 법안 처리는 국방부에 힘을 실은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인종차별 항의시위가 폭력 양상을 띠자 연방군 투입을 공언하고 에스퍼 장관은 군이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한다고 반기를 든 가운데 이 역시 국방부 손을 들어준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의사당 내 남부군 상징 동상 모두 철거
주한미군도 인종차별 상징으로 비판받는 남부연합기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미국 CNN방송이 15일 보도했다.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남부연합기를 주한미군의 일터, 공공장소, 건물 외벽에 내거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이 착용하거나 차량에 부착하는 것도 금지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남부연합기는 대한민국에서 복무하기 위해 파견된 미군의 가치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남부연합기 때문에 인종 분열의 감정이 커질 수 있다”며 “우리는 우리 내부에 그런 분열을 지닐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미 해병대는 이미 지난달(6월) 5일 남부연합기의 사용을 공식 금지했다. 의복이나 컵, 자동차에 붙이는 스티커 등에 남부연합기 문양을 부착하지 못하도록 했다. 남부연합기는 남북전쟁(1861~1865 년) 당시 노예제 존치를 주장했던 남부군이 사용했던 깃발이다.
플로리다 주 잭슨빌시에서는 지난달 9일 아침 일찍 시의 허밍공원에 있던 남부연합 군인 동상을 철거했다. 공원 옆 시청 앞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기 몇시간 전에 동상 철거가 이뤄진 것이다. 공화당 소속인 레니 커리 시장은 남부연합에 관련된 다른 기념물들도 철거하겠다면서 “남부연합 기념비는 사라졌다. 다른 것들도 사라질 것이다. 우
리는 여러분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했다.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세워진 리 장군의 동상도 랠프 노덤 주지사가 철거 방침을 밝힌 상태다. 리치먼드는 남부연합이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남부군을 이끌었던 리 장군은 인종차별의 선봉처럼 인식돼 있다. 리 장군은 버지니아주 백인들이 꼽는 대표적 버지니아 태생 인사다. 미 의회 의사당에 동상을 세우려고 주마다 지역 태생 대표 인물 2명을 뽑을때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리 장군이 선정됐을 정도다. 버지니아 주 포츠머스에선 남부연합 기념물 이전 계획을 연기한 포츠머스 시의회의 결정에 실망한 시위대가 직접나서 모뉴먼트 거리에 세워진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동상을 넘어 뜨렸다.
미국 최대의 자동차 경주대회인 나스카(NASCAR)는 이날 경기장에서 남부연합기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남부연합기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군이 사용한 깃발로 현재는 빨간 바탕에 흰색 별이 그려진 남색 띠가 X자로 그려져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서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이 깃발은 자동차 경주장에서도 종종 사용돼 그동안 나스카에겐 골칫거리였다. 브라이언 프랑스 전 회장은 2015년 남부연합기 사용을 금지하려다가 팬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NASCAR는 남부연합기를 계속 반입하는 관중을 어떻게 처벌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않았다.
남부군 리 장군 기마상도 철거하기로
영화 예술계도 수난이 닥쳤다. 스트리밍서비스 HBO 맥스는 최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유 콘텐츠 목록에서 삭제했다. 1939년 개봉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8개 부문을 휩쓴 명작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고착화하고 백인 노예주를 영웅적으로 묘사해 인종 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HBO 맥스 측은 성명을 통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 시대의 산물이며 불행히도 당시 미국 사회에 흔했던 윤리적, 인종적 편견 일부가 묘사돼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인종차별적 묘사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틀린 것이며, 이에 대한 규탄과 설명 없이 해당 영화를 방영 목록에 두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며 이번 조치의 배경을 설명했다. HBO 맥스 측은 추후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역사적 맥락에 관한 설명과 함께 콘텐츠 목록에 복구시킬 것이지만, 영화에 별도의 편집을 가하진 않겠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영화를 편집하는 건 이런 편견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과 마찬가지”라며 “더 정의롭고, 공평하며, 포용적인 미래를 만들려면 우선 역사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서부극의 전설 ‘듀크’ 존 웨인도 적폐 대상에 올랐다. 미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서부극의 대부 존 웨인이 인종차별 청산 대상으로 지목됐다. 오렌지카운티 민주당 의원들은 전설적인 배우 존 웨인이 노예제를 옹호한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영국에서도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정서가 확대되면서 곳곳에서 인종차별적 조형물 등이 제거되거나 제거를 청원하는 목소리가 확대하고 있다. 지난 6월 9일 BBC 방송에 따르면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은 이날 노예제와 관련된 인물 동상이나 거리 및 빌딩 이름, 기념물 등에 대한 검토를 지시했다. 이와 관련해 새로 설립된 ‘공공영역 다양성 위원회’(The Commission for Diversity in the Public Realm)가 노예제와 관련돼 있는 주요 동상 등을 제거해야 하는지 여부를 살펴보기로 했다.
다만 처칠 전 총리의 동상이 이번 검토 대상에 포함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최근 잉글랜드 브리스틀에서 열린 시위에서는 참가자들이 17세기 노예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을 끌어내려 강에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언론들에 따르면 북부 벨기에 접경의 소도시 오몽에 있는 샤를 드골 광장에서 드골의 흉상이 지난 15일(현지시간) 밝은 주황색 페인트로 뒤덮이는 일이 있었다. 흉상의 거치대 뒤에는 ‘흑인 노예제 찬성자’(esclavagiste)라는 단어가 대문자로 적힌 채 발견됐다. 오몽 시 당국은 페인트와 글씨를 제거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앞서 지난 12~13일 사이 파리 근교 센생드니에서도 샤를 드골의 동상의 얼굴 부분에 누군가가 노란색 페인트를 칠하고 달아난 일이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자국에서 대체로 정파를 막론하고 추앙받는 역사적 인물인 드골의 동상이 잇따라 훼손되자 충격을 받은 분위기다. 군인이었던 샤를 드골은 2차대전 당시 항독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France Libre)를 이끈 뒤 해방 후에는 프랑스를 강대국의 반열에 다시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