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특집]6‧25 전쟁 70주년의 수수께끼 “미국‧소련이 맞붙은 대리 공중전”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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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친,1994년 모스크바방문 YS에게 전달한 ‘옐친 문서’ 속에는…

소련 조종사들 영문도 모른 채
한반도 공중전에 참전해 죽었다

국기6‧25전쟁은 70년이 지나도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다. 6‧25전쟁이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진행됐으며, 어떻게 끝났는가를 정확하게 파악되야만 비로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6‧25 전쟁에 대해 줄곧 ‘미국이 남한을 사주해 일으킨 북침 전쟁’이라고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옛 소련의 비밀문서가 1991년부터 대거 공개되면서 1994년 모스크바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옐친 대통령이 전달한 일명 ‘옐친 문서’라는 한국전쟁에 관련된 자료 등등으로 세계 학계는 6‧25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직도 한국인들중에는 ‘북침 설’을 믿는 1960년대 사고방식에 얽힌 사람들이 많다. 소련이 한국전쟁에서 많은 조종사들이 미그15기를 타고 미국의 F 86조종사들과 거의 대등한 공중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성 진 취재부 기자>

스타미디어(StarMedia)가 2012년에 러시어판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는 러시아의 파벨 튜비크(Pavel Tupik)이 감독하고 아르템 드라브킨(Artem Drabkin), 브라디밀 쿠르프니크(Vladimir Krupnik) 두사람이 쓴 시나리오를 제작한 것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서방쪽에서 많이 제작 했는데 이것은 러시아쪽에서 본 한국전쟁 기록이라 비교면에서 관심이 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1994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김영삼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그 외교 문서들을 포함해 러시아측 소장 자료들을 인용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리뷰에도 나와 있다. 이 다큐에서 소련이 어떻게 한국전에 개입하였는지 확실하게 나와있는데 특히 한반도에서 벌어진 공중전에 미군 F86과 소련M-15이 직접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소련 미그기 조종사들의 승전보와 함께 전사자 신원과 숫자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전에서 제공권을 UN군이 장악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다큐에서는 소련의 미그기 조종사들이 미군 F-86제트기와 B 29등을 상대로 대등한 전투를 벌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에서 6.25 전쟁은 김일성과 모택동을 사주해 서울 점령 때까지만 작전계획을 만든 스탈린의 일방적 기획작품으로 묘사하기도 했는데, 이 다큐에서는 스탈린이 당시 소련 군사고문단장에게 “낙동강 방어선을 무찌르고 계속 전진하

▲ 한국전에서 소련 미그 15기와 공중전을 벌인 미공군 F 86 제트기

▲ 한국전에서 소련 미그 15기와 공중전을 벌인 미공군 F 86 제트기

지 않고 무엇을 하는가”라고 다구치는 전문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미군이 참전하는 시간을 주기위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을 3일 동안 멈추게 했다는 일부 학설도 이 다큐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총 4부작으로 한 편 당 약 한시간 정도 분량으로 아쉬운 것은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하여는 크게 다루지 않고 전쟁이 발발후 소련의 공군이 비밀리에 개입하는 것에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총 4부작에서도 거의 70%가 소련 공군과 미국 공군 조종사들의 전투 경과를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한국전쟁은 발발 당시 소련에서도 큰 뉴스로 알려졌다고 소개가 되었다. 협동농장 비상 확성기로 “극동의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며 농장 근로자 가족들이 놀라는 장면들이 나온다. 전쟁중 맥아더 장군이 해임됐다는 뉴스에 대해서도 중국의 모택동과 김일성이 매우 기뻐했다는 뉴스도 소개되고 있다.

“극동 조선반도에 전쟁이 벌어졌다”

한국전에서 소련 조종사들이 참전했지만, 처음에는 소련 조종사들이 중국말로 서로 교신하다가 상황이 급하면 러시아 말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어 그로부터 미군 조종사들에게는 소련 조종사들이 참전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나타났다. 소련측은 한국전 초기에 중공 조종사들을 주로 미군 조종사들과 싸우게 하고 소련 조종사들은 엄호만 하였는데, 값비싼 미그기가 계속 격추당하는 바람에 소련 조종사들이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미군 조종사들은 공중전에서 소련 조종사와 중공의 조종사들간에 현격한 실력차를 보였다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 조종사들은 2차대전에 독일 공군과 싸우면서 실력을 키운 조종사들이고 중공군은 초보들이였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것이다. 한반도 상공에서 맞붙은 미군과 소련군 조종사들은 각기 자신들의 전과를 엄청 부풀렸다고 한다.

농담쪼로 ‘조종사들이 원래 뻥이 심하다’는 말처럼 한 경향도 있지만 미군 세이버 제트기와 미그 15는 기체들이 튼튼했기에 피격을 당하고도 연기는 뿜지만 안전한데로 피해가는 경우가 많았다. 미군 조종사나 소련군 조종사도 연기 뿜는 것만 보고 격추시켰다고 보고를 하고, 같은 편대원도 연기 뿜는 것을 보고는 격추라며 확인해주었다고 한다. 한국전 초기에는 미공군은 북한 상공 공중전은 1:10 정도 교전비를 했다고 주장을 했는데 나중에 정밀히 조사한 결과는 중공군/북한인민군 상대로는 1:4-5 정도였고 소련 조종사 상대로는 거의 비등했다고 한다. 소련 조종사들이 숫적으로 UN군보다 열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실력들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맥아더를 대신하여 새로운 유엔군 사령관이 된 릿지웨이는 공군력을 총동원하여 공산측에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라고 지시했지만 미 합참은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후방 도시에 대한 전략 폭격을 중지시키고 지상군에 대한 근접 지원 작전에 집중하도록 명령하였다. 공산측을 지나치게 압박할 경우 휴전 회담에도 악영향을 줄 지 모른다는 트루먼 행정부의 정치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이겨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져서는 더더욱 안 되는 것’이 한국전쟁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딜레마 였다.

양측 전투 전과 뻥튀기로 확대해

미 공군이 전략 폭격 대신 38선 주변에서 근접 지원과 철도를 파괴하여 공산군의 병참선을 압박하자 미그 엘리 주변에만 맴돌던 미그-15들 또한 행동범위를 넓혀서 보다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게다가 이 시기에 오면 소련 공군 이외에도 북한과 중국 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을 시작 했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미그 앨리에서 미 공군은 숫적 열세에 내몰렸다. 물론 질적으로는 미 공군이 월등히 우세했지만 미그-15를 상대할 수 있는 전투기는 F-86 밖에 없었기에 머리 수에서 압도될 수 밖에 없었다. 미그-15 16대가 F-86 1대를 집중 공격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F-86 파일럿들은 “통상 8대1에서 10대1의 절대 열세 속에서 싸워야 했다.”라고 입을 모았다. 또한 F-86은 훨씬 먼 거리를 비행해야 하는데다 단독 전투가 아닌 폭격기들을 엄호해야 했기에 훨씬 불리한 처지였다.

미그기들은 F-86를 견제하면서 치고 빠지는 식으로 속도가 느린 B-29 폭격기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만 해도 하늘의 요새라고 불리며 막강한 위용을 자랑했던 B-29는 제트 전투기 시대에는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미군 조종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공산군은 대부분 소련 공군의 베테랑 파일럿들이 아니라 훈련이 빈약한 중국과 북한의 애송이 파일럿들이었다. 이들로서는 미 공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미 공군을 위협하되, 대개는 정면 싸움보다 직접 교전은 회피하는 등 경험 쌓기와 전력 보존에 치중하였다. 그 와중에도 때때로 무모한 만용을 부리다가 격추되기 일쑤였다. 공중전은 대부분 미 공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미 공군의 피해는 공중 전보다 근접 지원 중에 대공화기에 의한 격추였다.

▲ 한반도 상공에서 미공군 B29를 격추했다고 선전하는 소련 미그 15기.

▲ 한반도 상공에서 미공군 B29를 격추했다고 선전하는 소련 미그 15기.

문제는 F-86이 아니라 B-29나 다른 항공기들이었고 미그-15의 치고 빠지기식 공격에 B-29가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미 공군은 주간 폭격을 중단해야 했다. 전투의 양상 자체는 미 공군이 북한 지역을 폭격하기 위하여 올라오면 미그기들이 출격하여 요격 하는 식이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변화는 없었다. 소련은 미그-15의 엄호 이외에도 북한 내 비행장 복구를 지원하기 위하여 제 18 항공장비 사단을 파병하였다. 1951년 내내 평양과 신의주, 태천, 순천, 순안, 영유 등 도합 미그-15 운영이 가능한 11개의 비행장을 건설하고 미그기들을 배치했지만 미 공군의 거듭된 폭격에 밀려서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잔여 미그기들은 만주로 돌아갔다. 그 대신 만주에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하였다. 또한 레이더 기지와 방공포 기지, 지상 통제소들을 건설하여 미그기의 작전을 도왔다. 한국전쟁 동안 만주에 배치된 소련 지상 요원은 약 7만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모두 중국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만주에 배치소련 지상 요원 약 7만명

소련 공군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제 64전투비행 군단은 1950년 11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약 2년 8개월 동안 63,229회 출격하였다. 또한 주간 공중전 1,683회, 야간 공중전 107회를 수행하여 유엔군 항공기 1097대를 격추하고 262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소련 공군의 손실은 항공기 335대와 파일럿 120명이었다. 또한 소련 공군은 52명의 에이스를 배출하였으며 전과는 모두 미그-15였다. 특히 예브게니 페페랴에브(Yevgeny Pepelyaev) 대령은 108회 출격, 22.5대를 격추하여 한국전쟁 최고의 에이스가 되었고 소련 연방 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1951년 10월 6일에는 페페랴에브에게 격추된 F-86이 평양 서쪽 해변가에 불시착한 뒤 공산군 에게 노획되어 모스크바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 공군은 자신들이 524대의 유엔기를 격추시키고 224대를 상실했다고 주장하였다. 심지어 북한은 5,729대를 격추시키고 6,484대를 반파했다고 주장하였다. 다 합할 경우 무려 12,312대에 달한다는 얘기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들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 충분한 교차 검증을 거치지 않은채 사기 진작과 선전 목적으로 부풀여 졌기에 믿거나 말거나 한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유엔군은 공중전에서 827대의 미그-15를 격추하였고 230대의 항공기를 상실했다고 발표 하였다. 그 중에서 F-86은 78대가 격추되었다. 이에 따르면 미그-15와 F-86의 교환 비율은 1:10이 넘는 셈이었다. 하지만 미 공군의 자료 또한 엄격한 교차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조종사의 증언만 믿고 과장된 사례가 많기에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물론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미 공군의 압도 적인 우위는 부정할 수 없지만 격추된 미그의 대부분은 소련 공군이 아니라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중국과 북한 공군이었다. 소련 공군이 이들을 엄호했지만 중국 공군과 북한 공군의 미그기 들은 기체에 위장 페인트가 칠해져 있지 않아서 공중에서 쉽게 눈에 띄었고 미 공군의 움직이는 표적이 되기 일쑤였다. 또한 미 공군은 만주 접경의 단둥 비행장 상공에 잠복해 있다가 미그기가 이착륙할 때를 노려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원칙적으로 전쟁을 중국까지 확전하지 않는다는 트루먼 행정부의 방침을 위배하는 것이지만 파일럿들은 자신의 항공기에 달린 건 카메라를 조작하여 증거를 없앴고 상층부 또한 알면서도 적당히 묵인하였다.

최근 미국쪽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 미-소 양측의 공중전 손실은 거의 대등했다고 한다. 미 공군은 39명의 에이스를 배출하였는데 격추 1위인 맥코웰 소령만 하더라도 미그기에게 격추되었다가 겨우 탈출했을 정도이니 소련 공군은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 공군에게도 결코 만만찮은 존재였음은 틀림없었다. 공중전 만큼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의 대리 전쟁”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철저하게 미-소의 대결이었고 남한과 북한은 존재감조차 없을 정도였다. 또한 각각의 진영을 대표하는 두 전투기인 F-86과 미그-15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F-86와 미그-15는 전쟁 내내 꾸준히 개량되었다. 1951년 말 이후에는 소련 공군은 2선으로 빠지고 새로이 훈련된 중국과 북한 공군을 전면에 내세웠다. 소련 공군은 청천강 이북으로 넘어오는 미 공군을 요격한다는 제한적인 임무만을 수행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미 공군은 당장 큰 제약을 받아야 했다.

소련 공군은 52명의 에이스를 차출

소련 공군에게 한국전쟁의 참전은 미 공군이나 중국 공군과는 달리 결코 영광스러운 싸움이 아니었다. 이들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탈린의 명령 한마디로 갑자기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참전 군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대부분의 파일럿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원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당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머나먼 극동으로 가야했고 35년 동안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심지어 자신이 어디로 가는 지조차 모르고 만주로 갔다가 참전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군복을 입을 수도 없었고 자신이 소련 군인이라는 것을 밝힐 수도 없었다. 전투 중에 소련 말을 써서도 안 되었다. 이들이 소련 말 이외에 다른 언어를 배운 적도 없었음에도 스탈린의 명령은 무조건 소련 말을 쓰면 엄중히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제대로 지켜질 리는 없었다.

집에 보내는 편지도 철저하게 검열을 받았고 절대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음을 암시하는 글을 써서는 안 되었다. 이들이 포로가 될까 우려했던 스탈린은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자살할 것을 강요하였다. 실제로 격추 후 포로가 될 위기에 놓은 소련 파일럿은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공훈을 세운 사람들은 훈장을 받으면서도 군복 대신 민간인 복장을 해야 했고 남들에게 자신이 어떤 공을 세웠는지 말할 수 없었다. 그저 국가와 당을 위하여 기여했다는 것이었다. 전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무 중에 죽었다는 식이었다. 물론 참전 기념비 따위를 세울 수도 없었다. 전사자들의 사체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뤼순항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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