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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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코트라이트 박사 특별 초청

‘LA에서 열린다’

‘5·18’세계에 알린 평화봉사단원 ‘푸른 눈의 증인’ 저자

LA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기념하는 행사가 5월 18일(수) 오후 5시 30분 LA한국교육원 강당(680 Wilshire Place LA, Ca 90005)에서 열린다. 5·18 기념재단 LA지부는 한국의 5·18 기념재단과 함께 공동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제 42주년 기념식을 주최하며 후원은 남가주 호남향우회 등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을 위해 숨진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며, 항쟁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식과 기념 강연 등을 하게 된다. 특히 이날 광주 항생 당시 ‘5‧18의 소리’가 전세계에 전해지도록 헌신한 당시의 미평화봉사단원인 폴 코트라이트(Dr. Paul Courtright) 박사가 특별 초청되어 그의 생생한 5·18 현장 증언과 함께,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지난 2020년에 펴낸 ‘5‧18 푸른 눈의 증인’(한림출판사) 출판기념회도 함께 한다. 또한 5·18 현장 증언에 앞서 기념 공연으로 국악인 심현정 판소리꾼(토요풍류 음악 감독)이 김지현의 거문고 연주로 ‘어메이징-아리랑’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의 넉을 추모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의 범시민 단체연합의 이갑산 대표도 초청 강사로 초빙됐다.
✦문의: 정성업 5·18 기념재단 LA상임대표 (213)507-9920 revcs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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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 LA행사에 초청된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누구?

‘5‧18 푸른 눈의 증인’ 저자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 교수는 지난 2020년 5월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광주 민주화 운동 증언기록을 처음 출간 후 본보와 단독 인터뷰(지령 1219 호, 2020년 6월4일자)에서 “미국은 5‧18 재조사하고 잘못된 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2년 5월은 ‘5‧18 광주’의 42주년이 되는 달이다. 42년전 당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26세의 청년, 미평화봉사단원인 폴 코트라이트는 광주 인근 마을 호혜원에서 나환자들을 돕는 ‘푸른 눈의 청년’이었다. 그날 그때 일상처럼 의례적인 나환자들의 건강검진을 돕기위해 광주를 들렀는데 그때가 ‘5‧18’ 이었다. 그는 미국정부로부터 ‘광주에서 떠나라’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때 그 현장에서 학생 시민 들과 함께 ‘피바다 광주’의 소리와 절규… 그 모습을 일기장에 적었다. 나중 외신기자들이 광주에 오자 통역을 해주며, ‘5‧18의 소리’가 전세계에 전해지도록 했다. 그리고 42년이 흘렀다.

현재 68세의 반백의 공중 보건학 박사로 은퇴한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아직도 그날의 행위에 사과를 하지 않고, 또한 그때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자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회고록을 펴냈다”고 말했다. 그가 5‧18 민주항쟁 40주년을 앞두고 지난 2020년 5월초에 펴낸 ‘5‧18 푸른 눈의 증인’(Witnessing Gwangju, 한림출판사 2020)은 외국인 쓴 최초의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증언록이다. 현재 샌디에고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폴 코트라이트(66) 교수는 인터뷰 당시 고이 간직했던 일기 장의 한 페이지를 보여주면서 “회고록을 처음 펴내게 된 것은 우선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1980년 5월 광주 봉기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면서 “이제는 미국 정부도 대답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책을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회고 록을 펼치면 이런 글이 나온다. <1980년 5월 중순, 나는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서 근무한지 2년이 되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겐 목소리가 없어.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 바깥 세상 사람 들에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게.’ 할머니는 두려움이 없는 눈으로 나를 뚫어질 듯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나는 여기에 ‘목격하기 위해’ 있었다. 그 할머니가 내게 분명한 임무를 준 것이다.> 그리고 40여년이 흘렀다. 원래 평화봉사단원(Peace Corps Volunteer)은 봉사를 펴는 나라에서 정치적 행위에 개입이나 참여를 금지하는 지침이 내려져 있었다. 1979년 4월 한국에 파견된 제45기 미국 평화봉사단 20명 단원들은 광주와 전남 나주, 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의 병원과 보건소에서 결핵이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그 당시 폴 코트라이트 는 전남 나주 호혜원에서 한센 환자를 돌보는 봉사자였다. 그는 팔을 벌리면 방안 양쪽벽에 닫는 좁은 방에서 지내면서도 이를 불평없이, 달걀과 감자로 요리를 하면서 음악을 듣던 평범한 26세 청년이었다.

1980년 5월 어느날, 그는 일상처럼 한센병 환자를 데리고 의례적인 건강검진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광주 5‧18민주항쟁과 마주하게 된다. 이윽고 미국정부는 당시 현지의 평화봉사 단원 20여명에게 미국 시민의 안전을 위해 ‘즉시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폴 코트라이트와 동료 데이빗 돌린저(David Dolinger),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 윌리엄 에이모스(William Amos). 팀 원버그(Tim Warnberg) 등은 미국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우리 모두는 광주가 우리의 마을이고, 마을 사람들이 우리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한 폴 코트라이트는 “계엄군의 조치로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광주에서 우리라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40년 전을 회고했다. 폴 코트라이트 는 당시 광주에 특파된 타임(TIME)지 사진 기자인 로빈 모이어의 통역을 맡아 전남 도청, 전남대병원 임시 영안실 등을 다녔다.

데이빗 돌린저는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의 입과 귀가 됐다. 팀 원버그는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알려진 독일 제1공영 방송 위르겐 힌츠페터의 통역을 맡았다. 폴 코트라이트는 “통역은 외신 기자와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라고 우리 단원들은 생각 했습니다”라고 밝히면서, 당시 5월 24일, 전남도청에 마련된 임시 영안실을 TIME 사진기자와 함께 보았던 당시를 설명했다. 피투성이의 시신들은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폴 코트라이트는 나중 목숨을 걸고 언덕 산을 넘고 넘어 “5월 광주”의 참상을 알리러 서울 미 대사 관으로 향했다. 미국 정부의 ‘철수명령’에 불복종 하면서 전두환 군부의 압살정책에 굴하지 않고 광주에 남아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학생과 시민들의 입이 되었던 미평화봉사단원들의 죽음을 무릎 쓴 용기로 오늘 날 5‧18 광주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당시 한국의 군부 정권은 이같은 미평화봉사단의 행동을 ‘괘씸죄”로 몰아 1981년 한국에서의 평화 봉사단을 철수시키게 된다. 원래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지난 202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개최 예정 인 ‘5‧18 민주항쟁 40주년 기념 행사’ 참석차 한국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예기치 않은 코로나 19 사태로 한국 방문을 지금까지 연기했다가 올해 한국 방문 대신 LA에서의 기념행사에 참석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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