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 자긍심 고취…한인사회 정신적 지주
그는 약속을 지키고 떠났다
■ 소수민족 차별 속에서 중립성 덕목으로 드림 성취
■ 선조 발자취에서 정체성 확립 미래를 알려준 법관
■ 한국전쟁 폐해속에서 선진국된 조국 자랑스러워해
■ 하와이주법무부 애도 성명 “우리는 전설을 잃었다”
1950년대 말 미국 아이오와주는 당시 인구 99%가 백인이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도 매우 심했다. 당시 하와이 섬에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한인 학생이 아버지의 주선으로 아이오와 대학으로 유학했다. 그는 어느 하루, 캠퍼스에서 예쁜 백인 여대생을 보고 하와이에서 여고생 다루는 것처럼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 백인 여대생은 손짓으로 한인학생에게 대학 빌딩 뒷편을 가리키며 그 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나타난 그 백인 여대생은 난데없이 그의빰을 철석때리고 나서 “어디서 감히…옐로우가…백인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다니….”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후 한인 학생의 노닥거리는 모습은 캠퍼스에서 사라지고, 법대 도서관의 책벌레가 되어 있었고 그가 바로 미주한인이민사의 커다란 획을 그은 문대양 전하와이주 대법원장이었다. <성진 취재부 기자>
지금으로부터 약 120여년전, 1903년 1월 13일 새벽,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증기선 갤릭호(SS. Gaelic)가 들어섰다. 이 배에는 조선인 102명이 타고 있었다.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하와이에 도착한 최초의 한인 단체 이민자들이었다. 평양이 고향인 문정헌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와 함께 사는 꿈을 꾸며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이겨냈다. 그러나 그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돌아갈 조국을 잃은 것이다. 최초의 이민선 갤릭호가 호놀루루 항구에 도착한지 90년이 된, 1993년에 한인이 최초로 하와이주 대법원장에 선임되는 새로운 이민 역사가 펼처졌다.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한 최초의 한인 이민자 문정헌 씨의 손자인 이민 3세인 문대양(Ronald T. Y. Moon)이 주인공이다. 문 대법원장은 하와이주 역사상 최연소 대법원장이었으며, 연임으로 모두 20년 봉직하고 2010년 8월 31일, 자신의 70세 생일을 나흘 앞두고 정년 퇴임했다. 바로 그가 아이오와 대학에서 유학시절 백인 여대생에게 데이트 신청했다가 빰을 얻어 맞은 주인공 문대양 학생이다.
“얼마나 공부를 잘했기에 대법원장이 됐느냐고요. 어릴 때 학교 성적은 평균(average)정도였어요. 그냥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죠.”라고 생전에 한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문대양 전대법원장은 “왜놈 신발 신었다가 할아버지에게 혼쭐이 난 적도 있다”고 했다. 문대양은 하와이 이민 3세다. 그의 조부 문정헌씨는 120년 전 뙤약볕 아래서 고된 농장 일을 견뎌내고 미군기지 주변에 조그마한 양복점을 차렸다. 문정현씨는 고국에서 보내온 사진만 보고 신부 감을 골랐다. ‘사진결혼’이었다. 문대양의 부친 문덕만씨는 아버지 문정헌씨에게 양복점을 물려받았고, 역시 하와이 초기 이민자의 딸인 매리 이 여사와 결혼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전인 1940년 장남 문대양이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하는 가게 2층에서 문 판사와 세 명의 동생들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문대양은 부친과 할아버지로부터 애국심을 배웠다. 그의 부친과 할아버지를 포함한 초기 하와이 한인들은 임금의 20~30%씩을 떼어 300만 달러의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냈다. 그들의 하루 일당은 1달러가 채 안 된 64 센트였다. 문대양의 부모는 한 번 가본 적이 없는 고국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구호물품을 보내는데 앞장섰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하와이였지만 솔선수범하는 가족의 모습은 문대양이 한국계로서의 정체성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고등학교까지도 공부에 별 취미가 없이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길 좋아했다. 그는 10대 학창시절에 문제아도 모범생도 아니었다. 그때는 훗날 법관이 되리란 생각은 전혀 못했다. 1958년 아버지 문덕만은 장남인 문대양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미국 본토에 있는 아이오와주 대학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백인 주류사회를 한번 겪어보라는 계산이었다. 문은 그곳에서 소수 민족이 겪는 차별과 사회적 모순을 경험한다. 그는 택시기사에게 승차 거부를 당하고 휴게실에서 화장실을 쓰려다 점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이미 언급한 바처럼 백인 여학생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유색 인종이라고 딱지도 맞아 봤다. 이런 경험이 문대양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다. 그는 아이오와 주립대학 로스쿨에 진학했다. 인종차별을 비롯한 온갖 비합리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조인이 되기로 한 것이다. 문대양은 법대를 졸업하고 1965년 고향인 하와이로 돌아왔다. 유명 법률회사들은 아시아계란 이유로 그를 채용하길 꺼렸다. 그래도 행운이 따라 하와이 연방법원장의 서기로 취직해 법률가 로서 인생을 시작했다. 문대양은 1968년까지 하와이 검찰청 검사, 이후 14년간 법률회사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소수민족 차별 경험이 큰 전환점
그는 잘나가던 변호사를 그만두고 1982년 하와이 순회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지역사회에 더 큰 봉사를 하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변호사보다 판사가 더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판사로서 문대양이 맡은 첫 재판은 얄궂게도 ‘계’를 깨고 도망간 한국 여인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다. 주변의 백인 판사들은 이 ‘계’라는 것 자체를 잘 몰라, 한인계 판사로 임명된 문대양 판사에게 일임한 것이다. 백인 판사들과는 달리 문대양 판사는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어머니들이 하던 한인사회의 ‘계’ 문화를 너무도 잘 이해했기에 명쾌한 판결을 내렸다. 어머니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계’ 돈 만큼은 절대로 미루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선조들은 아직도 현지사회에서는 생소한 일본 말로는 ‘다로 모시’ 한국어로는 ‘계’라는 것을 조직해 상부상조하며 경제적 터전을 다져 같다. 그에게 맡겨진 ‘계’ 사건은 ‘계’를 깨고 도망간 어떤 한국 여인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고 부모님 덕에 ‘계’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그로서는 용의자를 찾아내 처벌해야 한다는 명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이미 본토로 도주한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공허한 판결’일 수 밖에 없었다.
문 전대법원장은 나중 “이민 100년이 넘은 지금도 이 ‘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며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1990년 주대법원 판사로 승진했고, 3년 만에 하와이주 전체의 사법권을 책임지는 10년 임기의 대법원장직에 올랐다. 2003년 주사법부 인선위원회는 문대양 대법원장의 연임을 만장 일치로 결정했다. 지난 수십 년간 숱한 아시아계 수재들이 미국 변호사 시험을 통과했지만 법관 으로 고위직에 올라간 케이스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문대양 대법원장에게 법조인으로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비결에 대하여,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대우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어느 누구든 차별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잘 대하라고 제게 늘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해 보이셨죠.” 문 대법원장은 한국에서 건너온 이민 선조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렇다고 자녀들에게 한국계와 결혼하라는 순혈주의를 고집하진 않는다. 조부가 생존했다면 불호령을 내릴 일이지만 문 대법원장의 부인은 일본 오키나와 출신이다. 그의 두 아들도 각각 일본, 하와이계 배우자와 결혼해 귀여운 손자들을 낳았다.
계 파동 사건 명판결로 명성
사탕수수 농장 이민 3세로 1940년 출생한 문 전대법원장은 미주한인 이민90주년을 시작하며 미주한인 이민100주년 기념사업 준비를 위한 대장정의 첫 발을 디뎠던 1993년, 하와이주 대법원장으로 발탁되어 미주 한인들의 자긍심을 한껏 고취시키며 이민 100주년 기념 사업 준비에 한껏 힘을 실어 주었다. 문 전 대법원장은 2003년 미주한인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을 거치며 현직 주대법원장으로 자신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자랑스러워 하며 그의 선친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표하곤 했다. 자신의 삶의 멘토가 바로 조부와 외조부 그리고 선친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은퇴 직후 한국을 비롯한 미국 각지역을 두루 여행할 것이라며 설레었지만 자택 지붕을 손보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낙상하며 한동안 고생을 하기도 했었다. 은퇴 후 동지회와 태극회 등 한인단체들의 활동에도 관심을 가지며 2010년 11월에는 하와이주 유일한 한인 은행인 오하나 퍼시픽 은행 이사로도 활동했다. 당시 문 전대법원장의 은행 이사직 수락 소식은 주류사회에 신생 한인자본 은행의 대외적 이미지를 높이며 한류 경제의 열기를 체감케 했다.
한편 그는 지난 2003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 참석해 법관의 첫째 덕목으로 중립성을 꼽았다. 당시 문 대법원장은 피부 색이 다른 내가 대법원장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도 인종과 종교를 떠나 법관으로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법관의 중립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인하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 그는 2008년에 문을 연 인천 월미도 이민사 박물관 개관식에 초청받아 감격적인 연설도 했다. 바로 그의 조부 문정현씨가 100여년 전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을 떠난 곳이 인천(당시 제물포)이기 때문이다. 문 대법원장은 “모든 이민자들이 그러했듯이 좀더 나은 생활과 기회를 기대했던 조상들은 사탕수수밭에서 고된 노동과 선입견, 주류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해야 했다”며 “친조부와 외조부 등 하와이 이민자들이 백년전 출발했던 항구도시 인천을 방문한 것은 큰 기쁨”이라고 감회를 표현했다.
최초로 이민자 선조들 재조명
그는 “가슴이 벅차 오르지만 또 한편으로는 슬픈 감정도 교차합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민사박물관을 보셨으면 참 좋아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할아버지 문정헌 씨와 외할아버지 이만기씨는 1903년 첫 이민선인 겔릭호를 타고 인천항을 떠나 하와이에 도착,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고난한 이민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마침내 105년이 흐른 2008년 6월, 두 이민 1세대의 손자이자 외손자인 문대양 씨가 하와이주 대법원장이 돼 할아버지 일행이 눈물 속에 떠났던 월미도를 다시 찾았던 것이다. 당시 문 대법원장은 “어머니에게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며 “이민사박물관 의 개관이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역사의 중요한 기념물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할아버지에게 내려온 한국의 가족, 노동 등에 대한 가치를 배웠기에 오늘날 이러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며 “전쟁을 겪고도 빠르게 성장하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폐기’로 논란이 그치질 않고 있다. 이 판례를 지지하는 국민이 66%, 폐기에 찬성하는 여론이 34%에 불과하다. 워싱턴DC의 한인 원로 법조인인 이인탁 변호사는 촤근 칼럼에서 “대법원이 미쳤다”라며 강하게 이 ‘낙태권 폐기’를 강행한 연방 대법관들을 비판했다. 지난 4일은 미국독립기념일이었다.
이날 우리는 미주 이민사의 최초의 하와이주 대법원장을 2회 (20년)나 지낸 문대양(82, Ronald T. Y. Moon 文大洋) 대법관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故 문대양 전대법원장은 생전에 “법관의 첫째 덕목은 중립성”이라면서 “법관은 정치나 이익집단 등 외부세력의 영향을 받지않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편 인물이다. 지금 문 전대법원장이 살아 있다면 과연 연방대법원의 ‘낙태권 폐기’ 판결을 어떻게 볼까? 아마도 ‘중립성을 잃었다’며 실망을 나타냈을지도 모른다. 문 전 대법원장은 생전에 “할아버지로부터 내려 온 한국의 가족, 노동 등에 대한 가치를 배웠기에 미주동포 중 최초로 미국의 주 대법원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며 “세계에서 한국처럼 전쟁을 겪고도 빠르게 성장한 나라는 없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가 자랑스럽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의 별세 소식에 하와이주 법무부도 성명을 통해 “우리는 전설을 잃었다. 그는 미주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대법원장을 역임했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2010년 하와이 주 정부는 문 전 대법원장의 업적을 기려 신축 카폴레이 지방법원 청사를 ‘Ronald T.Y Courthouse’로 명명했다. 하와이 왕립기사단(Royal Order of Kamehamehal|)은 2011년 그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했다. 문대양 전대법원장의 생애는 하와이 이민선조의 발자취와 미주 한인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