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LA민권운동 대부” 민병수 변호사를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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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평생 믿음과 소망으로 1.5세 2세들과 함께해
■ LA한인사회 정의의 챔피언 “큰 어른이셨다”추모
■ ‘1월13일-미주 한인의 날’ 제정에 앞장 선 인물
■ 암투병 중 ‘한인 이름’ 교명 탄생으로 100년 기초

지난 1일 평소 민병수 변호사와 한인 커뮤니티 관련 봉사활동을 하던 2세 홍연아(Yonah Hong) 봉사자가 민 변호사의 지인들에게 슬픈 소식의 이메일을 보냈다. “민병수 변호사님의 서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민 변호사님은 향년 90세로 오늘 아침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화 롭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It is truly heartbrea-king to share the news of Mr. Minʼs passing. He was 90 years old. Mr. Min passed away peacefully this morning and was surrounded by his beloved family.) 그로부터 LA한인사회는 애도와 슬픔에 빠져 들었다. 한인사회는 “진정한 원로 봉사자”를 잃었다. 하지만 그가 키워낸 한인 1.5세, 2세 그리고 3세들이 있어 우리 사회는 꿈과 비전이 있는 미래를 볼 수 있다. 고인이되신 민병수 변호사의 지국한 LA한인사회 사랑과 넘치는 애정의 흔적을 짚어 보았다.
<성진 취재부 기자>

민 변호사의 부음을 전해 받은 다큐멘타리 제작자인 크리스토퍼 이 감독은 본보에 이런 글을 보내 왔다. 이 감독은 3세 어린이들에게 우리 커뮤니티의 자랑스런 롤-모델들을 찾아주는 역할을 한다. “민 변호사님은 총알처럼 빠르시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슈퍼맨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또다른 슈퍼 파워를 보여 주셨습니다. 항상 우리 청년들에게 모범이 되어 주시고 멘토가 되어 주셔서 이제 저희 도 부모가 되어 민변호사님이 남겨 주신 지혜로운 말씀과 큰 힘으로 저희는 꼭 다음세대를 위해 더욱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 눈으로 또 다른 세상을…’

민병수 변호사는 말년에 한 눈을 잃었다. 사람들은 한 눈을 잃으면 ‘세상이 반쪽으로 보인다’고 했는데, 생전에 민 변호사는 본보 기자에게 “한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그동안 내가 보던 사물의 중심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감사한 건 한 눈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 하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됐다. 그래서 귀한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는 비록 한 눈을 잃었서도 또 다른 세상을 보는 눈을 만들었다.민 변호사가 한인사회로부터 어떤 신망을 얻고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중에서 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과거 이명박 전대통령은 2008년 취임 당시 공약 중의 하나인 LA총영사 등 일부 해외 총영사는 현지 동포출신을 임용하겠다고 해서 요즈음 재외동포청 출범 소식처럼 재외동포사회를 흥분시켰다.

당시 본보 임춘훈 칼럼니스트는 LA 총영사에 정통 외교관이 아닌 이곳 동포 출신이 임명된다는 소식이 전해진 어느 날, 미국 주류 사회와 한인사회를 아우르는 정치,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세명의 1.5세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LA출신 총영사가 온다는데 누구면 좋겠냐고 생뚱 맞은 질문을 던졌다. 한인타운에서 감투 따먹기 싸움질이나 하고 있는 언필칭 ‘1세 지도자’들에겐 다분히 냉소적인 이들 3명에게서 명쾌하게 특정 이름이 거명되리라고는 물론 기대하지 않았는데 헌데 뜻밖에도 약속이나 한 듯 이들의 입에선 ‘민병수’라는 이름이 동시에 튀어 나왔다. 당시 75세의 고령으로 한인사회에서 40여년간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일해온 민병수 변호사의 엄중한 존재감에 그때 임춘훈 칼럼니스트는 새삼 화들짝 놀랐다고 했다. 며칠 후 LA총영사가 공식 임명됐다. ‘민병수’ 아닌 ‘김재수’라는 이름이 신문에 실렸다. 당시 민병수 변호사는 안구암과 싸우고 있었다. 안구암이라는 희귀한 암에 걸려 2011년 3월말 왼쪽 안구 적출수술을 받고 한쪽 눈을 잃었다. 그의 한쪽 눈 실명과 투병 사실이 알려지면서 LA 동포사회가 시쳇말로 ‘민병수 앓이’를 하고 있었다.

당시 한인들은 그의 노년을 덮친 불의의 증세에 안타까워 하다가도 의외로 강인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암과 맞서 싸우며 주위 사람들을 다독거려주는 그에게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당시 본보 기자는 민 변호사가 안구암 수술을 글렌데일 지역 병원에서 받을 때 옆에 있었다. 하루는 병문안을 갔던 본보 기자에게 민 변호사는 “한눈으로 보는 또 다른 세상이 보이니 새롭다” 며 “그동안 두 눈으로 살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하더니 “한 눈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됐다”는 말에 위문 갔다가, 오히려 ‘선문답’만 실컷 듣고 왔다. 그의 정신력과 남을 배려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에 놀랐다. 그는 한쪽 눈만으로 새로 운전면허시험에 패스할 정도여서 차량국(DMV) 관계 자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민 변호사 초창기 변호사 시절에, 한 한인 할아버지가 어린아이의 ‘고추’를 만졌다가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성추행 범죄는 강력범으로 처벌 받는다. 당시 이 사건을 맡은 민 변호사는 한국에서 어른들이 손자뻘 어린이들에게 귀엽다는 표시로 하는 행위(?)라고 한국과 미국 문화의 차이를 적극 호소해 사건을 해결했다. 민 변호사는 건강이 허락했던 최근까지 많은 형사 관련 사건의 무료변론도 맡았는데 1975년 변호사 자격증 취득 이후 약 7천건의 소송 사건을 의뢰 받았는데 80%가 한인이었다. 그는 한인 끼리의 다투는 사건은 거의 맡지 않았다.

“한 눈으로 더 넓은 세상을 보았다”

지난 3월 5일은 민 변호사의 90회 생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1.5세와 2세들이 민 변호사의 생일 잔치를 70회 때부터 계속 준비해 왔는데 이날도 다르지 않았다. 이날 용수산에서 열린 생신 잔치에 참석한 80여명의 축하객들은 “다음 100회 생신 때를 준비하자”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 꿈은 이뤄질 수 이제 없게 됐다. 민 변호사는 생전에 시편 23 편〔다윗의 시〕을 좋아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 인도하시는도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 성경 구절을 좋아했던 민 변호사의 삶은 바로 진실된 정의의 인생이었다. 민 변호사가 한인 커뮤니티 일에 매달리는 것은 그 자신이 미주한인 이민사의 한 밀알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한인 청소년 및 2세들을 위한 활동은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1960년대 당시 2세들로 구성된 당시의 한인회(AKCO)를 시작으로, 1970년대 제인 김씨가 설립한 한인타운 청소년회관(KYCC)에도 이사로 관여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인 단체와 함께해왔다. 당시에 자신이1.5세로서 이민 1세들과 일하면서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 지만, 지난 2003년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이 끝나고 커뮤니티에 봉사정신과 애정을 가진 1.5세, 2세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의 지표도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한인 이름 최초의 초등학교 ‘찰스 H. 김 초등학교’ (Charles H. Kim Elementary School)와 중학교인 ‘김영옥 중학교’(Young Oak Kim Academy)의 명명 작업을 추진하면서 이들 1.5세와 2세 들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학교에 한인 이름 명명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민 변호사 자신이었지만, 타인종 커뮤니티 및 단체들을 제치고 한인 이름이 선정되도록 치밀한 준비와 전략을 준비한 사람들은 1.5세, 2세였다는 것이다. 민 변호사는 생전에 “1.5세, 2세들은 순수하면서도 유능하고 특히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이 많다” 면서 “이를 1세가 인정하고 도와주면 큰 일을 할 수 있고, 이들과 일하는 것이 요즘 내가 사는 기쁨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1년에 수 백 명씩 쏟아져 나오는 후배 변호사들에 대해 “인구에 비례해 1.5세와 1세가 이렇게 많이 진출한 것은 한인 커뮤니티 밖에 없다”면서 “변호사가 많아 지면 문제가 있을 때 법적으로 이를 대변할 인력이 많다는 뜻”이라고 했다. 민 변호사는 한국인의 오기로, 형법 변호사란 꿈을 키우게 된 동기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1960년 포모나의 기독 사립대학인 라번 유니버시티를 졸업했지만, 당시 차별적 정서로는 아시안 학생의 법대 입학이 거의 불가능했다. 웨스트 코비나 통합 교육구에서 15년간 교사로 일하며 변호사의 꿈을 접지 않았던 그는 1975년 마침내 주경야독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는 집념을 보였다.

인종차별 극복하고 변호사 자격

그 당시는 백학준씨가 판사로 임명되고, 이후 판사가 된 장병조씨가 LA에서 개업하고 있던 상황 으로 민 변호사는 캘리포니아주에서 3번째 한인 변호사였다. 변호사가 된 뒤 1992년 4월 29 일 LA폭동(사이구 폭동)은 민 변호사에게 한인사회의 권익보호에 더욱 크게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그는 폭동 당시의 톰 블래들리 LA시장과 최근 부정부패로 유죄 평결을 받은 마크 리들리-토마스 전 시의원, 캐런 배스 현 LA시장 등이 한인들에 대한 편견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폭동 이후 11명의 한인 변호사들과 함께 한인법률권익재단(KALAF)을 만들고 사재와 시간을 털어 리커 업주들을 대변해 LA시를 상대로 불합리한 조건부 영업제한(CUP) 조치에 대한 소송을 진행했었다. 민병수 변호사는 2020년 9월 미주중앙일보 특별 시리즈 “남기고 싶은 이야기”에 첫번째 주인공 으로 소개되었다. 그 연재물에 민변호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물론 한인 이민사도 겻들어 있다.

지난 2021년 12월에 성취된 코리아타운 선거구 재조정 문제는 지난 30년간 LA한인사회의 숙원 사업이었다. 그 선거구 재조정 문제에 민 변호사는 항상 동포들과 함께하며 투쟁을 벌였다. 선거구 재조정이 결정되기 전 민 변호사는 “나는 지금도 필요하다면 선거구 재조정을 위해 또 싸울 것”이라며 “민권 문제는 실패 없이 성공도 없다. 실패해도 계속 부조리함과 싸워야 한다. 이제 한인 사회 는 돈도, 영향력도 갖췄다. 끈기를 갖고 집요하게 우리의 권리를 주류사회에 주장하는 태도가 필요 하다”고 한인사회에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민 변호사는 형사법 전문 변호사인데, 어떨 때는 변호사인지 봉사자인지 구분이 잘 가질 않는다고 한다.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위해서 라면 상대방에게 무릎을 꿇는 것도 피하지 않았 던 민 변호사는 “한인 커뮤니티 대변인으로 나갈 때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며 “다음 세대는 침해하고 뺏는 리더십이 아니라 서로 돕고 함께 번영하는 리더십이 중요하다. 태평양 동쪽 (대한민국)과 서쪽(미주 한인사회)의 리더십이 합쳐져 새로운 시대를 맞는 날이 50년 안에 올 것” 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민 변호사는 “나는 (그때를)비록 못 보고 가겠지만 아쉽지 않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했고 이때까지 서러움은 다 씻고 간다.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했다. 민 변호사가 생전에 항상 보람을 느낀 봉사는 바로 미국 공립학교 명칭에 한국인 이름을 새겨 넣는 일이었다. 특히 찰스 H. 김 초등학교의 명명 작업을 추진하면서 한인 후세들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는 그는 1.5세와 2세들과 더불어 17개 타인종 커뮤니티 및 단체들을 제치고 찰스 H. 김이 학교 명으로 선정되도록 치밀한 준비와 전략을 준비해, 미국에서 첫번째로 한국인의 이름을 딴 초등 학교를 미국에 세우는데 성공했는데, 그는 이를 명실공히 한인사회 내일의 100년을 위한 내다 본 교육 프로젝트였다고 강조했다.

이민 1세, 2세들은 떠나도 학교의 이름은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0년대 한인 이름을 명명한 학교가 줄줄이 탄생하자 타아시안 커뮤니티가 한인 커뮤니티를 부러워했다. 이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2008년 윌셔 불러바드와 6가 사이의 샤토에 세워진 중학교에 김영옥 대령의 이름을 명명 하는 ‘김영옥 아카데미’ 프로젝트가 통과하기까지는 무려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2013년에 성사 된 닥터 새미리 매그닛 초등학교를 준비할 때는 안구 암 수술과 항암 치료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때였다. 그러나 민 변호사는 2세 봉사자들과 함께 차분하게 준비했다.

“50년 안에 새로운 시대 도래”

민 변호사는 한인 커뮤니티가 필요할 때 현장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봉사자였다. 2012년 4개 선거구로 쪼개진 LA한인타운을 단일화하는 캠페인이 진행될 때도 그가 있었다. 당시 암으로 안구를 적출한 지 1년도 채 안 된 시기였지만 그는 검은 안대를 착용하고 LA시 공청회에 참가해 한인선거구 단일화를 강력히 요구하는 발언을 남겼다. 그의 생애 중 약 70년간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현장에 있었고 여러 방면에서 활동해 왔지만 스스로 “다수보다는 소수에 속한 사람이었다”며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던 민 변호사는 2011년 안구 암으로 한쪽 눈을 적출한 후 다른 부위에도 암이 재발해 수차례 걸쳐 큰 수술과 방사선 치료 등을 받으면서도 커뮤니티를 위한 봉사 활동을 마다치 않았던 원로 봉사자였다. 그의 마지막 봉사 활동은 지난달 6일 한인변호사협회(KABA)와 LA센트럴라이온스클럽에서 ‘법의 날’을 맞아 한인타운에서 진행하는 무료 법률상담 세미나를 알리는 홍보 활동이었다. 그는 두 달 전 쯤 다리에 발생한 염증으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홍보 요청에 아픈 다리를 끌고 참여 했을 만큼 한인 커뮤니티를 사랑했다.

평소 민 변호사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후배와 1.5세, 2세들은 ‘미스터 민의 친구들’ (Friends of Mr. Min)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지난 70회 생일 때부터 민 변호사에게 깜짝 생일파티를 열어왔다. LA판 ‘민사모(민병수를 사랑하는 모임)’인 셈이다. 깜짝 생일파티의 주동자(?)는 민 변호사와 함께 찰스 호 김 초등학교, 김영옥중학교 명명 캠페인과 한인타운 선거구 캠페인 등에 함께 일했던 홍연아(한국어진흥재단 사무국차장), 캘로라인 심, 자니 박 사장(전 카페 맥 사장), 알렉스 차 변호사와 지미 차, 알렉스 김 전 주지사 보좌관, 장연화 미주중앙일보 기자 그리고 1세 비즈니스맨 박병철 회장(에버레스트 트레이딩 회장) 등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 3월 5일 용수산에서 90회 생신 잔치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1.5세와 2세 봉사자들과 함께한 활동들을 기억들을 되살리기도 했던 그는 4월에 폐렴 증세로 병원과 재활병원 입원을 수차례 다니다가 끝내 회복을 하지 못하고 지난 1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민병수 변호사는 LA코리아타운에서 현직으로 활동하는 최고령 한인 형법전문 변호사였다. 생전에 그는 “젊은 세대들과 함께 한 시절이 너무나 좋았다”면서 “그들이 있었기에 많은 일들을 할 수가 있었다”면서 “이 몸이 움직일 수가 있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는 현재 남가주지역에서 태어난 한인변호사 3천여명중에 세번째 변호사였다. 백학준 판사, 장병조 판사 등 선배 변호사에 이어 “한인변호사의 대부”로 든든한 맏형이었다. 생전에 민 변호사는 본보 기자와 만났을 때 “젊었을 때는 조국에 남아있는 친구들한데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또래의 친구들이 한국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거나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 이다. 한편으로는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와서 남이 안 하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나온 인생을 되돌아 볼 때 이 땅에서 한인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을 보면 미국 생활은 하나님께서 준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별세한 故 정용봉 박사와 함께 한국전쟁 기념사업과 국군포로송환위원회 활동을 함께 했다. 정 박사가 회장을, 민 변호사가 부회장을 맡아 법률고문 김한회 변호사와 함께 국군 포로 인권문제를 도왔다. 정 박사가 별세 후 그의 회장직을 인계 받았다. 그는 클래식 음악과 독서를 좋아한다. 특히 바이올린 콘첼토를 좋아한다. 주말에는 일거리를 들고 집에 들어가 일도 하고 부인 캐롤과 함께 외식도 하며 조깅도 한다. 슬하에 크리스토퍼 (덕기)와 티모시(선기) 두 아들이 있다. 민 변호사는 원래 교육자가 되고 싶었다며,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며 한인 2세들이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하는데 필요한 노하우를 전수시키고, 미국 정치인들에게 실제로 연결시켜주는 등 젊은이들의 멘토이자 롤-모델이 돼 왔다.

“동포사회 큰 어른” 사명 다해

그는 한인 커뮤니티 구성의 초창기인 1960년대부터 다양한 한인단체들에서 활동하며 커뮤니티의 발전과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 온 “한인사회 민권운동의 대부”로도 불린다. 부친 민희식 초대 LA 총영사의 아들로, 부친을 따라 미국에 건너온 한인 1.5세 이민자였던 고인은 70년 대 법조계에 입문한 올드타이머 변호사이면서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를 설립했고 한인 청소년센터(KYCC) 이사, 미주한인재단 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한인 커뮤니티의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또 이민사 보존과 발굴, 그리고 후세들에게 역사를 심어주기 위해 발로 뛰는 활동을 활발히 펼친 한인사회의 큰 어른이기도 했다. 특히, 4·29폭동과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 소녀상 건립, 한인타운 선거구 재조정 등 한인사회가 난관에 부딪혔을 때마다 앞장서 ‘봉사’의 참뜻을 몸소 후세들에게 가르쳐준 큰 스승으로 추앙 받 았다.

“한인사회 위해 일하는 게 가장 기쁨”이라고 누누히 강조하던 고 그의 별세 소식에 남가주 한인사회는 “큰 별이 졌다”며 한 목소리로 추모하고 있다. 민 변호사는 지난 1948년 부친 민희식 초대 LA총영사를 따라 10대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간다는 것이 한편으로 흥분이 되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살던 집과 친구들을 두고 떠난다는게 서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1948년 당시 인천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데 배에 올라타면서 소년은 부둣가 흙 한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라도 조국의 것과 가까이 있지 않는다면 허전하고 외로워 못견딜 것 같았기 때문이다. LA에 도착해서는 그 흙을 봉투에 넣어 보관했었는데 대학에 진학하고 변호사로 바쁘게 지나면서 흐지부지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다. 먼 옛날1948년 배 타고 떠났던 인천에서 줍던 그 때 조국의 흙이, 이 나라 어딘가에 떨어져 있으리라는 믿음과 함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하늘나라에 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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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변호사님 영전에,

민병수 변호사님, 이제는 더이상 그 온화한 미소를 만날 수가 없어 너무나도 슬픕니다. 지난 25년 동안 민병수 변호사님과의 인연은 이제 아름다운 추억으로 제 가슴에 남았습니다. 민 변호사님과 저는 제가 초임 변호사 시절인, 1998년에 한인변호사협회(KABA) 행사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분은 매력적이고 친절한 활동가였으며, 저와는 몇 십 년 나이 차이지만 영어에 편안한 올드타이머 1.5세대 한인으로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인 커뮤니티의 초기 개척자 중 한 분인 그분을 만나게 되어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그분은 한인 이민 70년대 초창기 시절에 한인 변호사들이 불과 10여분 정도 계셨을 때 KABA 회장을 역임하시며 활동적이셨고, 그리고 그분의 가족이 로스앤젤레스에 계신다는 사실도 존경 스러 웠습니다.

그분의 아버지가 1948년에 한국 정부의 로스앤젤레스의 최초의 총영사였기 때문 입니다. 2003년에 그분과 저는 한미연합회(KAC-LA) 이사회에 참여하면서 더 가까워졌습니다. 2005년에 제가 KAC의 사무국장이 된 후에는 한인사회를 돕는 일에 더욱 밀접하게 협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주류 유명 방송인 제이 레노가 한인 사회에 대한 무례한 인종 차별적 발언을 할 때 반대하기 위해 함께 일어섰습니다. 또한 미프로여자골프협회(LPGA)가 선수들을 위해 영어만 사용하는 정책을 시행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협력했습니다. 언어 장벽으로 인해 시니어 아파트 담당자로부터 학대를 받는 어르신들을 도와주는 일에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민 변호사님은 60년대 미국의 인종 폭동 중 항의에 참여했던 경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시위대에게 방수 호스가 쏘여지는 장면, 소수계 유색 인종을 지원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잊지 않고 문화 유산을 존중 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분의 젊은이들에 대한 애정과 젊은 변호사 및 대학생들에 대한 멘토링에 대한 열정이 보기 좋았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 사랑은 젊은 세대들이 민 변호사 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그가 최근 몇 달 동안 만났던 젊은이들도 그에게 매료되었고, 에너지를 얻었으며 그를 영웅으로 여겼습니다. 민 변호사님은 항상 웃음과 유머를 전하곤 했습니다. 인종 차별이나 편향적 지역구 재조정 과정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노력할 때도 그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가져다주는 점에서 믿을 수 있었습니다. 아시안 증오 사태를 막거나 중단하는 일 중에도 언제나 그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삶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는 암과의 싸움을 포함한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활동적인 삶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암 진단을 받고 한 쪽 눈을 잃었지만 자랑스럽게 안대를 착용하며 자신이 ‘해적’이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안대를 착용하고 우리외 함께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높이는 곳에 항상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가족과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존경합니다. 또한 민 변호사님을 향한 동료들과 친구들의 존경과 감탄은 진심 어린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정말로 성실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인생의 사랑이자 아내인 캐롤 민 여사님과 53년간을 함께 할 수 있어 매우 축복 받은 삶을 살았습니다. 민 변호사님이 저에게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 조언해 주시던 그 날들을 저는 그리워할 것입니다. 우리 지역 사회의 힘과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그와 함께 일하고 그를 알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저는 친구이자 선배님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 를 짓는 일을 할 것입니다.

2023년 6월 6일 현충일 LA에서 당신의 제자, 그레이스 유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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