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2] 6‧25 전쟁 70주년 참전기념비 건립주관 초석 ‘할 바커’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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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결코 잊혀진 전쟁이 되지 않을 것”

단장의 메아리가돼 돌아온
‘단장의 능선’처절한 전투

워싱턴 DC의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관’(Korean War Veterans Memorial) 건립을 주관했던 1988년 당시 ‘한국전참전기념관 자문재단’(Korean War Veterans Memorial Advisory Board)의 의장인 리처드 G 스틸웰 장군(R. G. Stilwell)은 할 바커(Hal Barker)에게 서신을 보내 “이 훌륭한 프로젝트(한국 전참전비)의 초석을 놓은 것에 감사한다”라고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서신에서 “귀하가 한국전쟁 참전용사기념관 건립의 선도적인 활동가로서 이를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던 당신의 명성은 잘 알려져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귀하는 1984년 12월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 건립에 가장 먼저 기금을 기탁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 법안(Florio Bill)의 통과를 위해 필요한 지지자를 모집 하면서 의회 활동에 대한 당신의 집념을 기억하고 칭찬하고 기억한다.”고 밝혔다. 편지 마지막 문구는 이러했다. “ 할 바커씨! 당신의 결정은 옳았습니다. 한국전쟁은 결코 잊혀진 전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 진 취재부 기자>

할 바커(Hal Barker)는 1951년 9월 캘리포니아주 엘 토로 해병대 공군기지에서 아버지(에드워드 바커 소령)가 한국 전쟁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때가 4살이었다. 할은 원래 아버지가 하와이 해병기지 근무 시절에 진주만이 내려 다보이는 미해군 병원에서 태어난 해병 가족의 막내 소년이었다. 그날 아버지와 함께 한국 전선으로 향하는 미군 수송

▲ 에드 워드 바커 해병대령(할 바커의 부친)

▲ 에드 워드 바커 해병대령(할 바커의 부친)

기에는 또 다른 해병 조종사 아서 드레이시 중위가 타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고지 전투에 출격중에 격추된 장본인이고 할 바커의 아버지는 그를 구출하려던 해병 헬기 조종사였다. 둘의 운명이 할 바커의 삶을 바꿔 놓았다. 한국전선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하는 4살 배기 할 바커는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따뜻한 캘리포니아 태양 아래서 내 손을 잡고 있는 어머니,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주위에 콘크리트 난간이 보이고… 배기 냄새와 비행기 엔진의 소음, 비행기로 올라가는 아빠의 모습 계단, 그리고 오른쪽의 관제소 건물 등등이 보였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몇년 후에나 알게 되었다” 해병대 조종사가 아들을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린 시절 할 바커는 천식과 알레르기를 가진 병약한 아이였다. 그는 대부분 소년들이 하는 야구 게임에도 소질이 없어 번번히 삼진을 당했고, 그러면 이를 지켜본 아버지 해병은 아들이 바보인 것처럼 아들에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할 바커는 10살 때 마지막 야구 경기를 끝으로 두번 다신 야구 게임에는 흥미를 두지 않았다.

더군다나 당시 의사들은 할 바커가 거의 장님 수준의 시력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두꺼운 안경을 처방해 주었다. 이 시력 때문에 나중에 군대에 가고 싶어도 신체검사에서 번번히 낙제했다. 한국전선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한국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 할 바커가 사진으로 본 아버지의 사진은 해병대 정복에 훈장이 눈에 띄었다. 자랑스럽게 보였지만 아버지는 그 훈장이나 한국에 대해 말이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자랐고, 그를 지켜봤지만, 한국에서의 전쟁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했다. 아버지는 해병 대령이었고, 할 바커는 해병대 집안에 막내 아들이었다.

‘가족사 흥미에서 출발한 거대한 꿈’

할 바커는 1979년부터 ‘한국전쟁 프로젝트’(Korean War Project)를 운영하면서 아버지가 싸웠던 한국을 가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참전용사 기념비를 건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아버지가 추락한 조종사 구출하려다 실패한 그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을 보고싶었다. 그는 의회를 상대로 한국전쟁참전용사기념관 건립 법안이 1986년에 통과되면서 한국정부에 ‘단장의 능선’을 방문하고 싶다는 청원을 했다. 그가 운영하는 Korean War Project(한국전쟁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1995년 워싱턴 DC에서 한국전쟁참전용사 기념관이 개막됨과 동시에 Korean War Project(한국전쟁 프로젝트)는 웹사이트를 구축해 한국전쟁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을 수록함과 동시에 한국전 참전 용사들간의 ‘사랑방’ 구실도 하고있다. KWP웹사이트(www.kwp.org)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해안 경비대는 물론 간호사, 의무대, UN사령부에 관한 자료들이 구비되어 있고, 특히 전투중 사망자(KIA), 실종자(MIA), 포로(POW)로에 관한 자료도 구비해 놓았다.

▲ KWP를 운영하는 할 바커(왼편)와 테드 바커

▲ KWP를 운영하는 할 바커(왼편)와 테드 바커

흥미있는 것은 이 사이트에는 한국전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의 모임이나 그들의 가족들의 이야기도 소개되고 있다. 한국전쟁프로젝트(Korean War Project)는 할 바커의 가족사의 일부로 1979년에 시작되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 역사학과를 졸업한 할 바커는 사진기자, 작가, 카펱터 등 다양한 직업을 지녔다.

그는 미국전사기념물위원회(American Battle Monu-ments Commission)가 관리하는 워싱턴 D.C.에 한국전 참전용사기념비(Korean War Veterans Memo-rial)를 건립하기 위한 설립자 겸 초기 기부자이다. 지난 25년 동안 KWP 사이트에 온 이메일 건수만 200만건이 넘고, 수십만명이 접속하여 왔다. 참전용사들이나 가족들이 보내온 전쟁 경험담 편지를 포함해 사진 자료 등등만도 서류 박스로 15개 박스가 넘는다. 할 바커는 “KWP사이트 유지비용은 오직 참전용사나 가족들이 후원하는 성금으로 유지되어 왔다”면서 “이제 참전용사들이 한분 두분 사라저가고 있어 걱정이다”라며 “그래도 우리는 정부나 기업들의 지원 없이 순전히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성의만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단장의 능선’ 고지에서 역사를 보다

한국정부는 드디어 1989년 2월에 할 바커를 초청했다. 할 바커는 서울 국방부에서 김원형 중위를 만났다. 그는 국방부에서 제공한 승용차로 비무장 지대에 있는 ‘단장의 능선’으로 출발했다. 가는 동안 춘천시에서 점심을 했다. 김 중

▲ 한국전쟁기념관 주체 기관이 할 바커가 기념비 창안자라고 인증한 서신내용

▲ 한국전쟁기념관 주체 기관이 할 바커가 기념비 창안자라고 인증한 서신내용

위는 할 바커가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하지만 할 바커는 그때가 두번째로 젓가락 식사였으며 한국 음식은 그때가 처음이라는 말을 그에게 하지 않았다. 춘천에서 포장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거친 흙먼지의 산길을 따라 74km 동안 달렸다. 바로 그길이 1950년 북한 공산군이 남한을 침범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오후 늦게 목적지 인근 도시양구에 도착 했다. ‘단장의 능선’을 지키는 제 24맹호사단에서 부대장을 만났다.

한국 군인들은 할 바커에게 모두 매우 친절했고 그에게 인삼차를 권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다시 할 바커 포함해 8 명이 지프 두대에 짐을 싣고 출발했다. 가는 길에 탱크나 장갑차들을 만났으며, 이윽고 좁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개울을 얼어붙어 있었다. 이윽고 표지판에는 ‘지뢰 매설지’라는 영어로 쓰여 있었다. 그곳 감시 초소에서 유엔군사 정전위원회의 파란색 완장을 받았다. 군인들은 지프의 파란색 깃발을 꽂았다.

할 바커와 함께 동행한 한국 정보부 장교가 “긴장돼냐”고 물었다. 그는 미소로서 대답했다. 차량은 거친 흙길을 쿵쾅거리며 올라갔다. 눈이 많이 내렸다. 더 높은 곳에 오른 후, 그들 앞에 산등성이에 있는 전망대를 보았다. 험준한 산세였다. 주위 콘크리트 벙커들이 줄줄이 세워졌다. 드디어 할 바커는 아버지가 훈장을 탔던 그 격전지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에 온 것이다.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 할 바커는 아버지가 헬리콥터를 출동해 추락한 조종사를 구하려고 한 그 상공과 추락한 조종사가 사라진 그 지역을 보며 ‘저기가 거기지’ 라며 떠들며 모두는 서로가 한꺼번에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조용해졌다. 김 중위가 관측소 꼭대기에 올라가자고 해서 모두 난간을 잡고 올랐다. 이윽고 931 고지 정상에 올랐다. 고지 정상은 몇 평방 야드밖에 되지 않는 평평했다. 멀리 북쪽 휴전선이 철망이 보였다. 할 바커는 아버지가 전투를 벌인 격전지에 왔다는 그 장소에, 추락한 조종사가 사라진 그 장소를 바라 볼 수 있는 그 장소에 왔다는 충격에 여전히 빠져 있었다. 한편 군인들은 그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채리고는 장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밑으로 내려갔다.

할 바커는 2월의 차가운 겨울 바람은 안고서 그 자리에 서서, 그가 그토록 오래 열망해왔던 그 격전지에 대한 감정에 불타 올랐다. 그는 서 있는 곳에서 영원토록 볼 수 있기를 바랬다. 험준한 산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할 바커는 그날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곳을 위해 싸우고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 능선들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는데, 미23보병대원들은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그처럼 악천고투를 벌였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할 바커는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된 이후 비무장지대 격전지 ‘단장의 능선’을 최초로 방문한 외국인이었다. 1994년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20일 할 바커는 본보기자와의 이메일 교신을 통해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일은 영광스런 일이다”면서 “이제 미국에 있는 참전용사들이나 가족들은 한국전쟁 참전을 영예로 생각하고 있다며 그들이 보내온 자료나 스토리가 거의 100만 건을 넘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갔을 때 마치 고향에 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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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와 쌍벽… 미군 1,670여명 사상자…

피의 능선이 된
‘단장의 능선’전투는…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미 2사단과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강원도 양구군 피의 능선 북쪽에 있는 ‘단장의 능선’(894-931-851 고지군)을 점령하기 위해 북한군 6사단능선을 상대로 펼친 고지전이다. 한국전쟁 중 백마고지 전투와 쌍벽으로 이룬 전투로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피의 능선’ 전투가 한창인 1951년 8월 공산군은 펀치볼(해안분지) 남쪽을 제외한 모든 곳을 점령한 상태에서 감제된 국군과 UN군, 그리고 이들의 진지들을 향해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이에 벤플리트 장군은 이들을 고지에서 몰아내 이 위협을 제거함과 동시에 구부러진 전선을 펴고자 했다.

9월 5일 피의 능선 전투가 끝나자 그 북쪽의 ‘단장의 능선’이 다음 목표로 지정되었다. 9월 13일 미군의 항공기, 전차, 포병들이 ‘단장의 능선’을 수시간동안 두들겼고, 이후 미 2사단 장병들이 능선 위로 기어올라간다. 하지만 그곳을 사수중인 북한군 6사단이 곳곳에 방공호 갱도를 구축해놓고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서 고지 주인이 2주간 서너번이나 바뀔 정도로 점령이 쉽지 않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저항하는 북한군을 몰살하려 했지만 이미 곳곳에 갱도들을 구축해 놓고 버티고 있는 상태라 미군은 1,67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쩔쩔맸고, 이에 종군기자들은 심장이 부숴지는 것 같다는 의미로 이 능선에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9월 27일 새로 부임한 로버트 영 사단장은 북한군의 보급을 계속 허용하면 능선 점령이 힘들어질 것이라 판단, 그 주변부터 점령해 고립시킨다는 터치다운 계획을 세우고 M4 셔먼 전차들로 구성된 미 72전차대대를 능선 서쪽 문등리로 투입하기로 한다. 이윽고 10월 10일 미 72전차대대 셔면 68대가 문등리로 들이닥치는걸 시작으로 사단의 총 공세가 시작되었다. 한편 문등리로 들이닥친 전차 대대 일부는 그 북쪽 하심포 들판까지 정찰을 나갔고, 이 과정에서 북한 13사단과 임무교대하기 위해 남하중인 중공 68군 204사단 병력들을 발견하고 전차포와 기관총으로 상당수를 살상한다. 한편 나머지 전차들은 문등리 후방에서 능선 경사면의 진지나 보급소 등을 보이는 족족 파괴하며 보병들을 도왔고, 이후 10월 13일 프랑스 대대원들이 능선의 마지막 진지를 점령함으로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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