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한 언론인의 삶과 작별 그리고 글 이철 전미주한국일보주필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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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 기자의 삶 “글쟁이 중에서 진짜 글쟁이”평가
◼ 저서 <뉴스 속의 뉴스>에는 Born Again 정신 구현
◼ 믿음의 신자, 언론계선후배, 친지들과 마지막 이별
◼ “그는 잘 익은 포도주 같은 언론인 이었다”로 기억

이철(세례명 어거스틴) 전한국일보 미주본사 주필의 장례미사가 지난 21일 OC어바인 소재 평화의 모후 한인성당(Our Lady pf Peace Korean Catholic Center, 14010 Remington, Irvine, CA 92620)에서 서종은 다니엘 주임신부 집전으로 약 200명의 조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이철 주필은 지난 9일(목) 오후 2시 5분 향년 83세로 미션 비헤오 엘더리 케어 홈스에서 숙환으로 영면했다. 고인은 한국과 미국에서 50년 이상 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1984년부터 미주 한국일보에 연재된 “이철 칼럼”으로 인기를 모았다. 1941년 중국 장춘에서 출생한 고인은 서울 동성고 졸업,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합동통신사 기자, 서울신문사 기자를 지내고 1973년에 미국에 이민하여 중앙일보 LA지사 편집국장 대리, 한국 일보 미주본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편집인, 주필, 부사장,고문을 지냈다. 저서로는 ‘뉴스속의 뉴스’ (2013)가 있다. 유족으로는 아들 이현과 딸 이수미가 있다. 이철 주필의 생애 남긴 글과 이력, 그 흔적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성진 취재부 기자>

신문기자는 말보다 글을 중요시 한다. 이철 주필도 신문기자로 일생을 살다 갔으니 당연히 글을 아끼는 언론인이었다. 라구나우즈 문인협회의 고영주 회장은 고인의 저서 ‘뉴스속의 뉴스’ 에 자신의 추천서를 담았는데, 누구 보다도 고인의 영면에 많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철 주필의 부음을 접하고 이런 글을 남겼다.<글쟁이 중에서도 진짜 글쟁이가 있었다. 그는 퍽 외롭게 살았다. 바로 라구나우즈 우리 동네에 살면서도 그 존재가 희미했다. 11월 21일이 바로 그 글쟁이 장례식이다. 유명하신 이철이란 분 이다. 그가 자기 비문에 “그는 잘 익은 포도주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남겨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의 만남에 언제나 맛 좋은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왔다. 죽음을 예견한듯 마지막 으로 남긴 저서 <뉴스 속의 뉴스>는 50년 그의 기자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컬럼을 정리한 값진 책이다.>

참 외롭게 살다간 참 언론인

‘뉴스 속의 뉴스’는 이철 칼럼의 모음집이다. 그의 50년 기자생활에서 쓴 칼럼 중 ‘새로 태어남’(Born Again) 정신이 담겨있는 글들을 모은 책이다. 소설보다 재미있는 ‘이철 칼럼’의 필자가 쓴 90여 편의 글들이 수록돼 있다. 고영주 회장은 이 책의 서평에서 “나도 모르게 매료되어 책을 들자마자 하룻밤 사이에 재밌게 다 읽어 내려갔다. (저자는) 심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금을 캐내는 신묘한 글솜씨를 지녔다”며 “자아 숙성의 Born Again 정신이야말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문학 세계의 중심 요체이며 신앙고백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고 추천했다. 이철 주필의 칼럼들이 미주한국일보에 게재될 때 독자들은 물론, 많은 평론가들이 칼럼 주제에 대하여 의견들을 많이 내놓았다. 당연히 국내외 한인 언론들도 칼럼 제목을 소개하며 시대성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철 주필의 장례미사에서 만난 박원홍 전국회의원은 한국일보, 동양통신 기자(워싱턴특파원) 미주동아 편집국징, 미주한국일보 라디오서울 방송위원을 지내고, SBS 그것이 알고싶다와 KBS 생방송 심야토론 진행자로도 활약했는데, “이철 주필이 미주 한인 언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친구”라며 크게 애석해 하였다.

“금을 캐내듯 신묘한 글솜씨”

고영주 문인협회장은 이철 주필과 이별하던 날에 이런 글도 남겼다. <이철님은 라구나우즈에서 7년 이상 사시면서 그 많은 동아리 중 오직 한 동아리 바이오 그룹에만 등록하였다. 유독 바이오 회원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의 마지막 여생을 바이오와 함께 했다. 그의 투병 생활은 몹시 외로웠다. 일주일에 3번씩이나 투석을 받으며 열심히 수영장을 다녔다. 건강을 회복하려는 그의 안타까운 노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겹게 하였다.>고 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교분을 지낸 장재구 미주한국일보 초대 회장은 미국에서 이 주필을 떠나 보내는 날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갖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 한국일보의 김명규 발행인을 포함해 미주 지역 LA, 뉴욕 시카고 워싱턴DC, 애틀란타, 시애틀, 달라스, 하와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지사의 전‧현직 사우들도 21일 장례 미사 시간에 고인을 기억했다.

이 주필을 떠나 보내는 날, 미주한국일보와 미주중앙일보 전현직 사우들과 한인사회에서 평소 고인과 절친했던 인사들도 먼 길을 와서 함께 환송했으며, 언론사들과 커뮤니티에서 조화로 이별을 고했다. 이 주필이 지난 9일 오후 2시경 영면하자 평화의 모후 한인 성당측은 신자들에게 즉시 부음을 전하며 고인의 영혼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 지난 14일(묵) 고인을 위한 연도 모임(기도회)에 100여명이나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지난 수년동안 육체적인 고통속에 힘든 생활을 하는 이철 주필의 옆에서 기도와 함께 보살핌을 한 자매님의 정성도 주위를 감동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철 주필의 장례미사에서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을 배려한 평화의 모후 서종은 다니엘 주임신부님와 장 빈첸시오 연령회장을 비롯한 교우 여러분에게 한인 언론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두드리라, 두드리면 열릴 것이요, 찾으라, 찾으면 찾을 것’ 이라고 한 뜻은 진리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한 말로 진리를 알기를 원하여 두드리고 찾으면 반드시 찾을 수 있고 깨달음을 얻어서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언론인으로서 이철 주필은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실천한 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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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언론인 이철 주필의
‘6‧25 역사 바로세우기’ 제안

<한국에 평론가들의 오피니언을 소개하는 ‘논객’(nongaek.com)의 권혁찬 객원기자 지난해(2023) 11월 9일에 이철 주필의 칼럼 ‘6‧25 역사 바로세우기’ 를 소개하며 독자들에게 역사 바로세우기를 강조했다. 이글을 쓴 후 꼭 1년후인2024년 11월 9일 이철 주필은 영면했다. 오늘날 북한군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터에 파견하는 상황까지 치달은 국제정세를 이철 주필은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 같다.>

재미 언론인 이철(83)씨가 6‧25 전야의 미스터리를 이야기하며 이젠 6‧25 역사를 바로 세울 때가 됐다고 밝혀 눈길을 끈다. 이철씨는 자신이 미국 LA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모아 펴낸 ‘뉴스 속의 뉴스, 뒤에서 본 뉴스’라는 책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저자는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이자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 장군의 증언을 인용해 신빙성을 높인다. 지난 2002년 사망해 이미 고인이 된 이형근 대장은 생전 펴낸 회고록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에서 6·25 전쟁 전후에 10대 불가사의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형근 총장은 서두에서 밝힌 내용 외에도 “전쟁 발발 한달 전부터 각 부대의 중화기 및 수송차량 이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부평으로 갔으며 6월 28일에는 강북에서 국군 2개 사단이 인민군과 싸우고 있는데도 한강 다리를 미리 폭파시켜 수많은 국군 장병이 퇴로가 막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도 덧붙인다.

그는 “6‧25 전후 사정을 종합 판단할 때 나는 군 내부에서 좌익분자들이 국군의 작전을 오도했다고 확신한다. 적과 내통한 자가 누구라는 심증은 갖고 있지만 조사한 결과가 아니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도 있어 이름을 거명하기 곤란하다”면서 “후일 누가 확증을 제시해 밝혀주길 바란다”고 당부 했다. 물론 이형근 장군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 증거로 뒷받침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형근 대장은 군 내부에서 강직하고 바른 소리 잘 하기로 소문난 장군 중의 한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자의 말을 가볍게 흘려넘길 일은 아니다. 책을 쓴 이철씨의 전력도 예사롭지 않다. 현재 80대 중반이 넘은 그는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1980년 전까지 국방부를 오랫동안 취재해 와 국방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이철씨는 한반도에서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원하지 않고 북한도 김정일 세습체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어 전면전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지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열려있는 만큼 북한의 도발행위에 대해선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리는 쌈닭이 되어야지 참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또 이제는 서울에 포탄이 떨어지면 한국 경제는 파탄이 난다는 인질 의식에서 벗어 나 경제발전의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국지전을 각오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이 남한을 우습게 보고 일부 지역을 점령한 후 협상을 하는 무모한 일을 감행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또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처형된 것은 ‘표면적으로 알려진 반당 종파 행위 부정부패 등이 아니라 쿠테타 음모를 꾸미다 숙청되지 않았을까’짐작할 정도로 남북관계, 국방에 대한 식견 이 깊다. 저자는 국방부 출입 기자 시절 6월 25일만 되면 한국 전쟁 특집기사를 쓰기 위해 육군 본부 장성 들을 만나 회고담을 많이 들었는데 이들은 6‧25 전야 한국군은 극도로 부패했었으며 군수뇌가 이적행위에 가까운 조치를 잇달아 취했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했다고 한다. 어떤 장군은 한국군 지휘부에 분명히 좌익이 있었던 것 같다며 고개를 꺄우뚱해 했다는 것이다. “그럼 당시의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이 좌익이었단 말이냐”고 물으면 “하여간 주변에 좌익 참모들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채병덕 참모총장의 부관인 라엄광 중위는 후일 남로당 간첩으로 밝혀짐)”고 한발 물러섰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는 않았다.

또 “신 과 채 총장은 너무 무능해 이적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됐어야 할 사람들인데 지금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에 묻혀 있고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으니 한심한 일”이라고 통탄했다. 저자는 당시 자신이 주워들은 이야기를 기사로 쓰지 못했다고 한다. 유신치하에 계엄령까지 내려 져 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합동통신과 서울신문 기자를 거친 저자는 12‧12 쿠테타를 일으킨 신군 부가 정권을 잡자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까지 중앙일보 LA 편집국장 대리, 한국일보 LA 편집국장, 한국일보 미주본사 주필, 부사장을 지낸 평생 언론인이다. 저자는 “12‧12의 군부 쿠데타도 진상이 밝혀지고 전직 대통령들이 감옥에 까지 갔다 온 마당에 6‧25 전야의 미스터리가 밝혀지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면서 “6‧25에 관한 역사 바로 세우 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6‧25 전쟁 때 국군이 열심히 싸웠다는 이야기만 했지 허술한 대비태세, 좌익의 군내부 침투 등 치부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왔다. 이는 1961년 5‧16 이후 1993년 문민정부가 출현 할 때까지 30년 남짓 오랫 동안 군부 출신이 정권을 잡아와 부끄러운 역사를 들추는 것을 꺼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늦었더라도 미스터리를 미스터리로 묻어두지 말고 실체를 규명해야 할 때라고 본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났고 당시 생존자들도 거의 없어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측 자료가 부족하면 북한이나 러시아(구 소련), 중국에도 관련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다. 저자는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옐친 대통령이 6‧25 전쟁이 북한이 주장 하는 것처럼 민족주의 통일 전쟁이 아니라 스탈린과 모택동, 김일성의 한반도 공산화 계획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비밀문서를 선물로 건네주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우회로도 있음을 넌지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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