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군부동요에 불안감
미국대사에 ‘1개월 내 해결’ 강조
미국이 지난 1993년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와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의 통화사실을 기록한 미국무부 비밀전문을 1차 공개할 때 ‘박대통령이 피격된 뒤 미국인 운영병원으로 후송됐다’는 부문을 삭제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미국이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할 경우,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미국이 연관돼 있다는 소문이 더욱 확산될 가능성을 있음을 우려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1993년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의 첫 만남을 기록한 미국무부 비밀전문을 1차 공개할 때 전씨가 시해사건과 미국관련설에 관해 언급한 부분 등을 삭제한 사실도 드러났다.
기자가 지난 2월 16일 새벽 입수, 보도한 1979년 10월 27일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국무부장관에게 보고한 ‘SE16336’전문은 미국무부가 지난 1993년 9월 13일 비밀해제여부를 검토한 뒤 공개했던 ‘SE16336’전문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1993년 비밀해제를 거쳐 공개됐던 동일전문에는 상당부분이 삭제됐으며, 특히 ‘박대통령이 피격 뒤 미국인 운영병원으로 후송됐다’는 부분 등이 삭제된 것으로 확인됐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박대통령 시해사건 다음날인 한국시간 1979년 10월 27일 오전 8시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와 최규하 당시 대통령권한대행과의 통화내용을 담은 이 전문은 1993년말 공개될 때는 원문 전체 12개항 중 3항과 4항, 그리고 5항 중 일부, 8번 항이 삭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격 뒤 미국인 병원으로 후송됐다는 내용이 실린 조항은 4항이다. ‘부상을 당하지 않은 김계원은 박대통령을 대통령 전용차에 태워 (만찬장의) 근처에 있는 미국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옮겼고[A NEARBY HOSPITAL RUN BY AN AMERICAN DOCTOR.] 7시 55분 병원에 도착했다. 비서실장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다시 심장이 뛰지 않았고, 비서실장은 박대통령이 병원도착 약 5분전에 죽었다고 추정했다’.
미국은 23년전 4항 전체를 삭제한 채 일부만 공개했던 것이다.
미국인병원 후송 부분 삭제 숨은 의도
이처럼 미국이 글라이스틴-최규하 통화가 기록된 전문을 공개하면서도 이 부분을 삭제한 것은 ‘미국인병원 후송’을 기록한 비밀전문이 드러날 경우 엄청난 후폭풍을 우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특히 1993년은 김영삼 전대통령이 취임한 해로, 사실상 군부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탄생된 해였다.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하루아침에 물갈이되는 등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화, 민주화 분위기가 충만한 시기였다. 만약 이때 ‘박대통령이 미국인병원에 후송됐다’는 최규하 대통령의 발언이 공개된다면 박대통령시해사건에 미국이 연관돼 있다는 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반드시 진상을 밝히겠다는 여론이 들끓었을 것임은 충분히 예견되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우려가 미국이 이 부분을 삭제하도록 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이 삭제한 3항은 최규하 대통령이 설명한 피격당시의 상황, 삭제한 5항의 일부는 최대통령이 우발적 사건인지의 여부를 현시점에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 부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가 삭제된 8항은 ‘최대통령이 김재규는 현재 군부에 의해 감금돼 있고, 군이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부분으로 확인됐다.
또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의 첫 만남을 기록한 미국무부 비밀전문도 1993년 1차 공개 때 12개항 중 2,4,6,7,8,9,10,11,12항등이 전체 또는 일부가 삭제됐으며 삭제부분 중에는 전씨가 박대통령 시해사건과 미국이 연관됐다는 설을 언급하는 항의하는 부분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전두환, 시해사건에 美 관련설 의혹제기
1993년말 공개전문과 2월 16일 입수한 전문을 확인한 결과 두 전문은 1979년 12월 15일 글라이스틴대사가 보고한 ‘SE18885’로 일치했다. 이 전문은 미국측과 신군부의 우두머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록한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 1993년말 미국이 공개 때 삭제했던 11항에는 ‘전두환은 미국이 미국통제하에 있는 정승화를 시켜서 나를 체포하려함으로서 나를 힘든 입장에 처하게 한 사실을 발견했다고 경고했다. 또 미국이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연관돼 있으며 김재규의 형량을 낮추려 한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고 있으며 전씨 자신이 이 같은 소문을 진정시키기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라는 부분이다. 당시 공개전문에는 ‘전두환은 그가 발견했다고 경고했다’는 첫머리만 살린 뒤 그 뒷부분은 삭제했다.
그러나 이 뒷부분, 글라이스틴 대사가 전씨에게 말한 대목은 공개했다. 글라이스틴대사는 ‘나는 이 기회[전두환의 앞부분 발언을 의미]를 이용해 미국은 박대통령시해사건이나 김재규 형량을 줄이려는 시도 등에 관련돼 있지 않다고 단호하고 강력하게 부인했다’고 기록한 부분이다.
당시 삭제됐던 9항은 전씨가 군부내에서 자신이 불안한 위치에 있다며 호소하면서 한 달 내 안정시킬 것이라고 말한 내용으로 확인됐다. 9항은 ‘장래에 대해 전씨는 한국군부가 현재 표면적으로는 조용하지만, 수면아래는 그렇지 않다. 아직 군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정승화 추종자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들은 군부의 안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전은 적어도 한 달간은 이 같은 상황이 해결되지 않겠지만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상황이 안정될 것으로 믿고 있다. 전은 만약 1개월 내에 한국군부내 내부적 문제가 모두 해결되면 한국군은 더욱 강력해지고 단합될 것이며, 전투준비태세와 리더십이 확립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적고 있다.
또 삭제된 맨 마지막 항, 12항은 ‘브루스터가 동석했다’는 내용이다. 로버트 브루스터는 ‘대사 특별보좌관[SAA]’이라는 공식직함을 가진 CIA 한국지부장이다. 이날 만남은 글라이스틴 대사와 브루스터, 전두환, 그리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통역자가 배석한 것이다.
미국측과 신군부사이의 모종의 묵계 의혹
삭제한 조항 중 미국측과 신군부사이의 모종의 묵계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을 유발하는 4항, 전씨가 12‧12사건에 대해 그 전말을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6,7,8항은 지난주 이미 보도했었다. 즉 김재규가 10월 26일 직전, 이건영에게 8백만원, 정병주에게 5백만원, 정승화에게 3백만원을 지급했다고 전두환이 언급한 대목은 최초 공개 때 모두 삭제됐던 것이다.
이처럼 미국정부가 지난달 16일 새벽, 박대통령 시해사건 발생 약 37년, 부분공개 뒤 23년만에 이 같은 비밀전문들을 전면 공개함에 따라 당시 미국측이 10.26사건과 12.12사태에 대해 어떻게 파악했는지, 신군부와 미국과의 접촉은 어떠했는지 등 역사상 공백으로 남았던 부분이 마치 퍼즐처럼 조각조각 맞춰지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최대통령은 ‘박대통령이 피격뒤 미국인의사병원으로 후송됐다’고 파악하고 있었음이 밝혀짐으로써, 과연 국군수도통합 병원으로 후송되기 전 미국인 병원에 먼저 후송됐다면 미국이 먼저 박대통령의 시신을 보고 사망을 확인한 셈이 된다. 그렇다면 김재규와 미국과의 관계 등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숨겨진 1인치를 반드시 다시 찾아내고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