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이민의 고향,
메리다에서 김치 시연회

▲ 이자경(이민 연구가)
필자가 지난해 6월 2일, 멕시코만을 거슬러 올라가 메리다(Merida) 공항에 내리자 일순 익숙한 열대의 찜통 무더위가 훅- 끼쳐 든다. 3월부터 6월 사이는 건기로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연중 가장 무더운 시기다. 멕시코 한인 이민 선조들은 이 땅을 지옥의 불가마라고 불렀던가. 1905년 5월 불볕 땅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은 프로그레소(Progreso) 항구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인 메리다에 도착, 그리고 20~30여 농장으로 분산돼 본격적인 노예생활에 처해졌다. 에네켄(henequen) 가시에 찢기고 할퀸 상처가 전신을 휘덮은 채 살갗 속을 파고드는 살인적 햇볕 속에서도 하루에 5천, 8천 장까지 에네켄 잎을 잘랐던 선조들을 생각해본다. 메리다는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에게 언제나 제2의 고향이었다.
100여 년 전 속아서 영국 선박(S.S. ILFORD)에 실려 멕시코 유카탄에 도착한 한인들은 4년 간 농장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다. 누군가는 모험심이 많아 신천지도 구경할 겸 큰돈도 벌어 금의환향하려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귀국해서 대궐 같은 집을 사서 떵떵거리고 살고 싶었을 것이나 모든 꿈은 무참하게 깨져버리고 말았다.
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전체 1천여 이민자 중 20명만 귀국하고 나머지는 거의 멕시코 여기저기 서러운 땅에 묻혀갔다. 에네켄 협회 대리인 역할을 하던 영국인 협잡꾼(John G. Myers)과 악랄한 일본의 대륙식민회사가 합작해 꾸민 이 사건은 20세기 초 마지막 제국주의 시대에 발목을 잡힌 채무노예 스스로의 운명이었다.
19세기 전반 영국이 흑인 노예무역 철폐를 선언하고 미국도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자 갑자기 노동시장엔 수도 없는 싱크 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노동 공백기에 채무 노예제(debt peonage)가 앙칼지게 들어서고, 협잡꾼들은 세계를 돌면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유혹해 턱없이 부족한 노동시장을 채우기에 바빴던 것이다.
막상 노예 신분에선 풀려났으나 기술도 없고 말도 못 하고 수중엔 무일푼인 막막한 현실,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선비를 벌기 위해 아는 게 에네켄 따는 일밖에 없는 그 지긋지긋한 에네켄 농장(hacienda)에 다시 취업했다. 그동안 현지어인 마야어와 스페니쉬를 습득한 1.5세 한인 주무원(contratista)을 통해서다. 주무원이란 농장에 한인 노동자를 소개하고 둘 사이의 계약을 전담하는 사람이다.
그런 가운데 1910년의 한일 강제합병 소식은 너무나 가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한인들은 다시 메리다로 모여들어 대성통곡하며 나라를 잃은 슬픔을 몇 날이고 울고 울었다. 환국해서 일본 놈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이 땅에서 오직 독립과 광복을 위해 살겠다는 결의가 뜨거웠다.
필자에겐 어느덧 30년 가까이 멕시코 이민 전문가로 활동한 것이 이번 멕시코-쿠바 지역의 김치 문제 조사자로 발탁된 연유 같다. 옛날엔 이민사 취재를, 이번엔 김치라는 짐을 안고 찾아온 메리다는 필자를 고향처럼 푸근히 맞아준다.
특히 메리다는 여러번 들락거렸지만 가장 마지막에 와 본건 2007년,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낮엔 산티아고 광장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에 참석하고, 저녁엔 하얏트 호텔에서의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사〉 출판기념회에 얼굴 내보이기 위한 행보였다.
메리다 에네켄 생산 메카

▲ 한인들이 채무 노동자로 일하며 정착한 메리다 지역은 멕시코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한인들이 끌려온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메리다는 에네켄 생산의 메카로 악명을 떨쳤다. 에네켄으로 부를 축적한 이 도시는 겉모양은 파리의 샹젤리제처럼 화려했으나 바로 그 뒤쪽엔 수천의 에네켄 농장들이 널브러져 채무노예들을 혹독하게 착취하고 있었다.
그 농장의 대부분은 유카탄의 주지사이면서 ‘에네켄 황태자’ 대접을 받던 올레가리오 몰리나의 친인척들인바 좋든 싫든 그의 산하에 예속돼 있었다.
올레가리오 직속으로 50여 명은 모두 에네켄 귀족들로서 소위 당시 멕시코의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바치는 대신 경제적 이득을 꿰찼던 정경 유착의 대표적 집단 즉 ‘과학자들’(cientificos) 그룹에 속했다.
1988년 메리다 첫 방문 시 맨 처음 만난 사람인 고 김인현(Manuel King Jimenez)이 필자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듯이 이번엔 그분의 5녀 텔마(Thelma)가 공항까지 따라 마중 나와서 낯선 필자에게 자기 집에서 체류하라고 손을 내민다. 그야말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그렇게 역사는 기적을 낳고 또 대를 잇는가.
우리는 먼저 박물관으로 향했다. 2005년 이민 100주년을 맞은 후 한인계의 정체성이 확실히 높아진 실정이다. 그때 한국 정부가 마지막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관이던 건물을 리모델링해준 장소가 바로 오늘의 ‘메리다 한인 박물관’이다.
관장 헤니 장(66, Geny Chans Song)이 반갑게 맞는다. 장석환의 후예로 수십 년 간 유카탄 항공사 지사장을 지내고 은퇴한 뒤 박물관장 자리를 수락한 그녀의 얼굴에 진땀이 흘러내린다.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과 진열장 안에 정돈해 놓은 귀한 유물들을 보며 다시 한번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는 듯했다.
헤니는 필자의 100년 사 책 속의 내용들을 대조해가며 자신의 가족사를 정확하게, 그리고 꼼꼼하게 도표로 정리한 것을 보여준다.
박물관에선 한 주에 세 번씩 저녁마다 한글 배우는 소리가 들린다. 스파르타 교육을 방불케 하는 김무선 선교사의 뜨거운 한글교육 사명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현재 그의 문하생은 10명 정도. 그는 학생들에게 공신애(22), 공규하(10), 김옥경(16), 김현종(20), 김희애(54) 등 한국 이름까지 지어줬다.
김현종과 김희애는 호세와 텔마의 한국 이름이다. 2011년부터 멕시코시티에서 실시하는 한국어 능력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다.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한 7명은 모두 한국에 유학 보낸 바 있다.
이민 100년 상징 한인 박물관
6월 5일 아침 10시, 우리는 박물관에서 불고기를 곁들인 김치 시연회를 가졌다. 전날 텔마 가족과 함께 중앙시장(Central de Abastos)에 가서 배추와 양배추 등 필요한 물품을 준비했다. 그러나 과일과 채소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시장 구석구석을 아무리 뒤져봐도 배추(napa chicora) 꼬랑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도매 위주의 대형 시장으로 엄청 많은 물건들이 상점마다 쌓여 있었다. 운이 좋으면 찾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훑고 또 훑었으나 역시 허사였다. 지금은 중국인들이 배추농사를 지어 그나마 운 좋은 날엔 살수 있다고 해서 시장바닥을 두 시간 넘게 돌아다녔을까? 그렇게나 보이지 않던 배추가 어느 상점 구석에서 검정 비닐 백에 넣어진 채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 게 그만 필자의 레이다망에 잡혀 들고 말았다.
그래 비닐 백을 열어보니 그 안엔 중간 크기의 배추가 세 통이나 얌전하게 들어 있었다. 배추 속을 펼쳐보니 큼직한 옹이가 저마다 들어찬 불량품(?)이었으나 그래도 이게 어디람, 하고 신바람이 난 일행은 다른 물건들을 사기 시작했다.
무는 도무지 없고, 누군가 대용으로 히카마를 가져왔는데 수분이 다 빠져 딱딱한 게 쓸모가 전혀 없어 보였다. 히카마로 채를 쳐서 배추 속을 만들려던 꿈은 저만치로 날아 가버렸다. 수박은 큰 놈으로 세 개를 차에 실었다.
재료는 배추 3폭, 양배추(repollo) 3폭, 머리가 큰 쪽파 5단, 마늘(ajo) 쪽마늘 6통, 히카마(jicama) 큰 것 두 개, 생강(gengibre) 한쪽, 고춧가루(chilearbol) 큰 봉투 2개, 밀가루 조금, 소금(sal) 한 봉지, 잡채 세 봉지였다.
사온 배추를 박물관 부엌에서 속을 갈라보니 옹이뿐인 속 빈 강정이어서 어떻게 할지 몰라 서성였다. 어렵게 구한 배추이지만 해도 너무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정육점에 들러 쇠고기와 닭고기 50명분을 사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가격은 LA보다 많이 헐한 듯했다.
한국과 달리 한우니 수입산이니 그런 걱정 일체 없이 인근 도축장에서 방금 도살한 신선한 고기를 산 것이다. 8시경 박물관에서 김무선 선교사가 가르치는 한글 반에서 공부하는 텔마와 호세 모자를 따라와 배추는 일단 옹이만 빼내고 소금물에 담가놓았다.
양배추도 소금물에 담가놓은 다음 쪽파와 마늘, 생강 등은 씻어서 냉장고 넣어둔 채 내일을 기약했다. 수돗물은 마냥 졸졸 흘렀다. 물 사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 김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자경 이민연구가.
다음 날 아침 9시 40분이 돼서야 집을 나섰다. 텔마와 아들 호세가 준비물(잡채, 고기 굽는 전기판 등)을 트렁크에 싣고 20분 거리인 박물관을 향해 달렸다. 도착하자마자 잘 절여진 배추를 씻어 물기를 뺀 후 텔마와 호세를 시켜 병물과 콜라, 종이접시 등을 포함한 잡화들을 백화점인 코메르시알 멕시카나(Comercial Mexicana)까지 가서 사 오도록 했다.
헤니는 시간 개념이 철저한 듯 정시에 문 앞에 나타났고, 그리곤 헤니가 연락한 후손들이 속속 나타난다. 한 시간 반 거리인 차크 마이(Chac May)에서 온 난시 홍 마르티네스, 두 시간 반 떨어진 깜뻬체에서 달려온 이르빙(Irving Lee Gutierez) 후손 회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그날 행사의 동영상을 찍어주었다. 고인이 되신 이덕순 할머니의 따님과 며느님, 아드님들이 도착했고, 엘 뽀요처럼 닭을 맛나게 구워서 파는 서씨(Sosa)네도 딸 둘과 아내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무이비엔’, ‘무이 사브로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것으로 배추김치, 양배추 김치를 만들어 선보이며 후손들과 한국 반찬 1호인 김치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함께 나눌 차례다. 젓갈은 헤니가 가르쳐준 대로 따라 했다.
마른 황새우에 물을 붓고 불에 우려낸 그걸 젓갈이라고 믿는 마음으로 사용했다. 헤니의 남편(스페인 혈통)은 젓갈을 김치에 넣을 땐 코를 틀어막는다고 헤니가 말한다. 누군가가 히카마를 썰어서 배추 양푼에 넣는다. 할 수 없이 그 딱딱한 것을 양념에 버무려서 배추 속으로 하려다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그걸 김장하듯 속에 마구잡이로 양념으로 옷 입혀서 비슷하게 만들어 배추김치 한 잎씩 입에다 넣어주니 모두들 맛있다고 ‘무이 비엔!’이라고 난리다. 맛이 좋단다.
나중엔 배추 이파리를 모두 떼어내고 거기다 참기름과 깨소금을 첨가해 겉절이 형태로 버무려 함께 나눠먹었다. 또 다른 양푼엔 쪽파를 길게 썰어 넣고 거기에 양파 마늘 생강 등을 넣어 이것 역시 참기름과 깨소금을 곁들여 겉절이로 만들었다. 양배추 김치는 먹기 좋게 정사각형 모습으로 썰어서 양념은 배추김치처럼 해서 버무렸더니 역시 ‘사브로소’가 터진다.
이렇게 배추김치(또는 겉절이), 쪽파 겉절이, 양배추 김치는 완성되고, 불고기는 그냥 어슷어슷 약간 두껍게 썰어서 김치에 넣었던 양념들을 다 털어 넣은 다음 마지막에 간장을 적당히 부어 몇 번 버무린 것을 프라이팬에서 구워 먹었다. 모두들 불고기도 맛있다고 난리다. 마음이 찡 아파왔다. 좀 더 맛있게 해드릴 수도 있었는데.

▲ 메리다 한인박물관에서 김치 시연회를 하고 있는 이자경 이민 연구가와 한인 후손들.
후손들은 배추와 고춧가루 등 필요한 재료들을 구하기 어려워 소수는 양배추와 오이로 김치를 담가먹는 반면 대부분은 아예 먹지도 않는 편이란다. 후손들이 실내를 훈훈하게 가득 메운 가운데 그런대로 시연회는 성공적이었다. 잡채는 어떻게 만들어 먹었는지 잡채를 담았던 텅 빈 그릇만 보일 뿐 기억에도 없을 정도로 바쁜 하루였다.
남은 김치(배추, 쪽파)는 텔마가 집으로 가져갔다. 그날 밤 텔마의 남편 호세와 장남 미겔(27)과 차남 호세 주니어 등 이렇게 남자 셋이서 그걸 그냥 마구 손으로 집어먹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아침엔 텔마와 한인과 마야의 혼혈인 텔마의 친정어머니 마르가리타(84)까지 합세해서 필자가 떠나는 날까지 김치로 하루 세 끼를 해결하는 듯싶었다.
그들 속에 잠시 잠자고 있던 김치 DNA가 드디어 눈을 뜬 것인가. 김치는 이미 이 혼혈가족의 DNA를 대번에 통일한 듯하다. 세계 통일이 따로 없어 보였다.
“우린 어머니가 잡화점을 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김치와 잡채 등 한국음식을 직접 만들면서 딸들에게 가르치셨어요. 아들 호세도 김치 만드는것 잘 알아요.”
텔마가 공항 나갈 채비를 하면서 불쑥 던진 말이다. 남편 호세는 마야와 스페인의 혼혈 피만 흐를 뿐인데 김치가 최고로 맛있다고 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주니 얼마나 고맙고 가슴 뜨겁던지 몰랐다. 떠날 때 다시 오라고 밀짚모자까지 선물로 건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