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C학술대회 특집2 – “미국 언론이 3·1운동을 세계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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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2천만명을 친구로 만들지,

적으로 만들지는 일본, 그들에게 달렸다”

1919년 3·1운동은 당시 국제적으로 약속 국가이며, 은둔의 나라인 코리아(Korea)가 세계에 한줄기 빛처럼 일어나게 만들었다. 3·1운동은 당시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약소국들에게도 “우리도 코리아 처럼 독립을 외치자”고 영향을 준 세계적 사건이다. 본보가 답사한 USC대학 한국학도서관에서 최근 국민회 유물 자료 등을 정리한 ‘코리안아메리칸 디지털 아카이브’에 소장된 자료들에 서 미국 언론 관련은 의미있는 기사가 많았다. 3·1운동이 서울에서 중국 상하이로, 러시아 연해주로 그리고 미국 하와이, LA,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 D.C. 시카고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멕시코 멕시코, 쿠바 아바나,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 등지로 소식이 전해진 것은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한민보(New Korea Times)가 전 세계로 전했던 것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당시 미국에 있던 안창호 등이 국민회를 통해 각 지회에 연락했으며,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 등이 미언론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알렸다. 이와 함께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미국의 권위지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를 포함, 주류 언론들이었다. <성진 취재부기자>

3‧1 운동 발발 소식을 처음으로 해외에 알린 외신 기자는 한성(서울) 주재 앨버트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AP겸 UP(현재 UPI) 통신원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당시 조선에서 금광 개발사업을 벌이면서, 사업을 위해 아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였는데, 아들 테일러는 아버지 사업을 도우면서 AP와 UP(현재UPI) 두군데 통신원을 겸했다. 사실 3‧1운동 소식을 주류 언론 NYT나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지(San Francisco Examiner)보다 더 먼저 알린 미국의 지방신문들이 있다. 그중 서울에서 테일러 통신원이 전송한 AP기사를 받은 앨라스카주의 콜도바 데일리 타임스(The Cordova Daily Times)와 몬타나주의 그레이트 폴스 데일리 트리뷴(Great Falls Daily Tribune)지는 1919년 3월 10일자에서 1면 배너로 “한국 독립을 선포하다” (Korea Declared Independence)라는 제목을 달고 톱 기사로 보도했다. 그 이외 중요 지방신문들은 1919년 3월 10일자로 워싱턴주 시애틀의 시애틀 스타(The Seattle Star), 필라델피아의 이브닝 퍼브릭 레저(Evening Public Ledger),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의 리치몬드 타임스(Richmond Times-Dispatch), 아리조나주 피닉스의 아리조나 리퍼블릭(The Arizona Republican), 오레곤주 살렘의 데일리 캐피탈 저널(The Daily Capital Journal),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오마하 데일리 비(The Omaha Da-ily Bee) 등등이다.

미국의 대표적 주류 언론들 3·1운동 보도

신문이처럼 3월 10일자 앨라스카주 콜도바 데일리 타임스와 몬타나주의 그레이트 폴스 데일리 트리뷴 등을 비롯한 미국 신문사들이 다룬 3‧1 운동 초기 기사의 출처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소식통, AP 와 UP 서울 통신원, 상하이와 베이징 그리고 도쿄 등에서 보내온 AP통신 등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미국의 대표적 주류 언론인 NYT와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는 3‧1운동의 진면목을 꿰뚤어 심층 보도하여 미국 조야에 ‘한국은 독립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미국 언론에게 3‧1운동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미국 언론에게 영향을 준 이승만 박사와 정한경 박사의 공헌도 크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는 1919년 4월 6일(일)자 1면 배너 제목으로 ‘한국의 비무장 봉기’(Korean Uprising An Unarmed Revolt)라고 특집 보도하면서 “캘리포니아의 신문 발행인이 ‘최초로 (일본 당국의)검열 받지 않은’ 뉴스를 지니고 왔다”라는 부제를 붙였다. 이 날자 신문은 1면 전면을 3‧1 운동 소식으로 도배하고 4면에까지 연결시킬 정도였다. 특히 이 신문은 ‘3‧1 운동의 세계사적 의미’를 조명했다.

그동안 서방세계는 3‧1 운동의 역사적 배경이나 한국 민족의 독립의 정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했다면서 “한국의 독립시위는 아마도 민족자결과 이상의 실현을 위한 조직화된 소극적 저항의 ‘가장 경이로운 사례’라는 점을 서방 세계는 미처 몰랐다”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 신문은 “예단하기는 이르지만 한국의 시위가 궁극적으로 일본의 정책, 나아가 미래 극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부제에 ‘일본의 정책은 그 영향의 결과로 확실하게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전했다. 신문은 서두에서 기사 작성자 발행인 발렌틴 스튜어트 매클래치는 3·1 운동 당시 한국에 있었고, 미국에 오기전 전국 각지를 다니며 3·1 운동 목격자들을 만났으며, 일본 당국의 검열을 피하여 자료를 가져왔다고 적었다. 이 신문 기사는 현장 취재담과 목격담을 담은 기사로 고종의 죽음과 국장일(3월 3일), 이를 받아들이는 한국 민중의 반응, 민족 지도자 33인의 움직임, 천도교의 가세까지 구체적으로 취재한 내용들로 작성됐다. 그리고 봉기에 나선 한국인들이 일본 군경에 대한 보복적 폭력이나 재물 약탈 행위를 한 일이 전혀 없음에도 일본 헌병들을 죽였다는 거짓 정보가 서울의 몇몇 특파원 이름으로 일본 언론에 게재 됐다는 당시 일본 언론에 조작된 관제기사가 실린 사실도 비판했다.

“검열 피한 3·1 기사”

1919년 6월 15일자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6면 톱기사로 ‘한국, 독립을 선언하다’(Korea Proclaims Indepe-ndence) 라는 제목의 전면 심층기사가 실렸다. 이같은 기사는 세계 언론은 물론, 미국의 조야가 3·1 운동을 실감 있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기사의 부제목은 “일본 치하의 조선이 강권의 구질서에 저항하고, 자유를 선언했다” (“Chosen” as Japanese Dub Province, Declares Its People Free, Defies Old Order of Brute Force.)는 부제목이 달렸다. 특히 NYT 기사에서는 3·1독립선언문의 영문번역본 전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의 정신이 미국인들에게 직접 전달되도록 했다. 특히 이 신문은 3·1독립선언문의 첫 문장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는 구절을 영문으로 ‘We herewith proclaim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the liberty of the Korean people’로 기사화 했다. 또 이 신문은 한국의 근대사인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거쳐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수난사, 1907년 헤이그 특사의 행보까지도 간략히 전했다. 그리고 한국을 “단기 4천 252년 역사의 옛 은둔의 왕국(Hermit Kingdom)”으로 소개하면서 “한국은 청일전쟁의 전리품 으로 (승전국인)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됐다. 그렇지만 아주 오랜 민족성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라고 전했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1919년 4월 24일 사설에 ‘한국’(Korea)을 등장시켰다. 이 신문은 “한국인들은 자치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놀라운 정도의 애국심과 자제력, 조직 능력을 보여줬다”면서 “한국인들은 세계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또 신문은 일본의 폭압적인 탄압을 나열하면서

▲앨버트 테일러 AP 한국통신원

▲앨버트 테일러 AP 한국통신원

“일본이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방식은 그들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다”면서 “최근 몇년간의 군사적 통치는 한국은 물론 일본의 이익도 훼손 하리라는 것을 많은 일본인이 깨닫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한반도의 2천만명을 친구로 만들지, 아니면 적으로 만들지는 일본 그들에게 달렸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1919년 3월 13일 AP통신을 인용해 3·1 운동을 보도한 이후 4월 13일 기사에서 역시 AP통신 기사를 인용해 독립운동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동시에 미 샌프란시스코발 기사에서 “일본이 시위대를 학살하고 있다”고 전했다. 5월 13일에는 프랑스 파리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한국 대표들의 활동을 소개했다.이 신문은 기사에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한국인들의 청원이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 됐다”면서 “이 청원은 한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1910년 국권침탈을 무효로 할 것을 요구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뉴욕타임스에는 3·1 운동과 관련해 친일 미국인들과 한국의 이승만, 정한경 등이 논박을 벌이는 기사도 등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3·1운동소식 속보로 전달

연합뉴스에 따르면 뉴욕타임스는 1919년 3월 20일자 기사에서 드류신학대학 에드문드 데이비슨(E.D.) 소퍼 교수는 3·1 운동을 “아직 자치의 준비가 돼 있신문2지 않은 한국인에 의한 소요”라고 말하면서 일제 지배하에서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개선됐다는 주장을 폈다. 일본 태생의 E. D. 소퍼 교수는 일본식 식민지 근대화 론을 펼쳤던 친일 지식인으로 꼽힌다. 장인화 전명운 의사에게 암살당한 더함 스티븐스와 유사한 인물이다. 이에 정한경은 소퍼 교수의 기고가 실린 다음날인 3월 21일 자에는 ‘한국의 호소’(Korea’s Appeal)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이 신문에 기고했다. 정한경은 기고문에서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과는 달리, 실제로는 한국이 철저하게 수탈당하면서 일본에 종속되고 있다고 조목조목 주장 하면서 3월 20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이집트와 한국’ 사설에도 반박했다. 정한경은 “자치능력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당신들의 정치적 철학에는 동의한다”면서 “그렇다면 일본같은 군국주의 나라들에는, 자치능력이 없다는 전제하에 다른 국민들의 열망 을 짓밟을 권리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지금 모든 한국인은 자치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원하고 있다”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본질은 기회의 균등이다. 오늘날 한국인은 그들의 가능성을 개발할, 빼앗길 수 없는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정한경은 “능력이 없다는 가정하에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어린 여자아이에게 수영을 배워야 한다면서 정작 (위험하니) 물가에 가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적었다.

뉴욕타임스가 4월 24일자 사설을 통해 3‧1 운동을 공식 지지한 이후에도 미국 지식인들의 친일적 주장은 이어졌다. 조지 T. 래드 예일대 교수는 5월 11일자 ‘한국 봉기의 원인’(Causes of the Korean Uprising)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비밀 조직들의 선전, 선교사들의 반항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3·1 운동을 폄훼했다. 래드 교수는 기고문에서 폭도(mob), 폭동(riot), 반란(revolt)등의 부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 일본에 우호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하여 일주일 뒤, 이승만 박사는 ‘일본에 대항하는 한국’(Korea Against Japan)이라는 제목의 5월 18일 기고문에서 “래드 교수의 칼럼에 대해선 확실한 답변이 필요한 것 같다”면서 “2천만 명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래드 교수가 ‘비밀결사에 의해 촉발된 수동적인 혁명이 한국이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대체 이런 정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라며 “래드 교수는 단지 미국에 있는 일본 선전가들의 말을 속삭이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에 뉴욕타임스 5월 21일 자에는 정한경 박사가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부 지식인이나 급진적인 선동가에 의한 것이 아니다”면서 “일반 대중, 모든 종교의 남녀들이 군사적 압제로부터 자유를 외친 것”이라는 내용의 기고문을 올렸다.

‘친일 미국인 3·1폄훼’

현순목사가 상하이에서 3·1 운동 발발 소식을 샌프란시스코로 전문을 보내고, 그 전문을 받은 안창호가 국민회를 통해 UP통신으로 알리고, UP가 미국내 언론사에 타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300만 명의 독립단이 예수교도, 천도교도와 함께 들고 일어났다”는 현순의 3·1 운동 통보전보를, 정한경은 3월 9일 밤 안창호로부터, 이승만은 3월 10일 각기 서재필과 정한경으로부터 들었다.” (한국독립사연구 보고서) 위 인용문에서 보면,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안창호는 3월 9일 정한경(Henry Chung)에게 3· 운동 관련된 소식을 전한다. 따라서 현순목사의 전문은 안창호를 거쳐 UP쪽으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민족독립운동사>에서 나타난 자료에서도 3.1운동에 관한 당시 자료가 나온다. “3월 9일 샌프란시스코 오전 11시,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상해 현순목사로부터 독립 운동 폭발의 전보를 받고 곧 회전을 치고 이승만과 정한경에게 타전, 또 각 지방회와 서재필에게도 타전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영자신문들에게도 전보 복사문을 돌렸다. 3월 9일 호노룰루, 현순은 같은 내용의 전보를 하와이국민회에도 보내어 하와이에도 9일 일요일 오전에 받았다. 하와이는 샌프란시스코 보다 시차가 일러 하와이에서 받은 시간은 오전 8시 경이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교회집회를 통해서 소식의 전파가 쉬웠고 오후에는 600여명이 모여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3·1 독립운동 발발의 소식은 3월 4일 일본에 있는 영자지들은 이미 발표하였으나 독립선언 자체는 없었고 미국과 하와이는 현순목사의 전보로 10일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의 영자신문들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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