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에서의 미군 희생자는 한국군 희생자의 27%
◼ 전사자 54,246명을 비롯해 총 172,800여 명 희생
◼ 아이젠하워 ‘내 아들을 후방에 배치해 달라’ 충정이유
◼ 개인과 가족 보다 국가 사회를 위해 충정 희생 정신
6월 6일은 한국의 현충일이다. 이날 우정의 종각에서는 첫번째 토요일에 열리는 타종식에 앞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과 월남전 참전용사들을 초청하여 대한민국 육군협회, 한미선구자 협회 등 호국, 애국단체들과 함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추모했다. 한편 오는 25일은 한국전쟁 76주년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분들이 또 있다. 한국전쟁 참전 미군들이다. 미군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7월 1일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후 3년 1개월 간 전쟁을 치루면서, 전사자 54,246명을 비롯하여 실종자 8,177명, 포로 7,140명, 부상자 103,284명 등 총 172,800여 명이 희생당했다. 국군 희생자가 645,000명에 비해 무려 27%나 된다. 이처럼 많은 미군이 한국 땅에서 희생된 것이다. 특히,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포함해 장군의 아들142명이나 참전였는데, 그 중에서 35명이니 전사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성진 취재부 기자>
미국 제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중위는 1952년 한국전쟁 당시 미3사단의 중대장으로 참전하였다. 1952년 12월,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영웅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 사령부를 찾았다. 당시 강직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와 벤프리트 주한 미군사령관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당시 그 자리에는 미8군과 한국군의 고위 장성들과 참모들이 모두 참석하고 미국 등 전 세계의 유명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군 사령관인 벤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 브리핑이 끝나자 조용히 듣고 있던 차기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하였다.
‘장군,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가 전투 사령관에 대한 첫 질문 치고는 너무나 대통령답지 않은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꿈쩍도 하지 않는 벤프리트 장군이였기에 (벤프리트 사령관 아들은 한국전에서 B-29 폭격기를 몰고 북폭을 나갔다가 행방불명이 됨) 모두들 무슨 일 이 벌어질까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드님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의 미 제3사단 정보처에 근무하고 있습니다.’라고 벤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는 모두가 놀랄 사적인 부탁을 조용히 말했다. ‘사령관 님.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이 모두 의아해하자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이 전투 중에 전사를 한다면 슬프지만 나는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포로가 된다면 적국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고 들 것 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이 잘 알다시피 미국 국민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 고 외치며 나와 미국에게 적국의 요구를 들어 주라는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령관이 내 아들을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순간 두리번거리면서 의아해하던 분위기가 반전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표정이 되고 곧이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각하!’라는 벤프리트 장군의 대답이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한국전 참전 아들과 미국 대통령의 충정
이 이야기는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미 2사단 72전차 대대의 대대장 파렌바흐(T.R. Fehrenbach) 중령이 쓴 <This kind of war>(한국전쟁 이야기)라는 책에서 증언하고 있다. 서울의 유명한 워커 호텔 이름의 유래가 된 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과, 그의 아들 샘 워커 중위는 미 제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부자가 모두 6·25한국 전쟁에 헌신한 참전 가족이다. 워커 장군이 1950년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2월 23일 의정부에서 차량 사고로 순직 시, 아버지 시신을 운구한 아들 샘 워커 중위는 아버지를 잃은 뒤에도 계속 군에서 복무하여 1977년 미국 최연소 육군 대장이 되어 자유의 불사신이 되어 ‘부전자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시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버지는 그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우리 미 24사단을 독려하고 후퇴 작전에서 큰 전과를 올린 우리 사단에 대한 부대표창과 미국정부가 저에게 수여한 은성무공훈장을 제 가슴에 직전 달아 주시려고 지프차로 달려오시다가 의정부와 문산 간의 어느 도로에서 후퇴중인 한국군 트럭에 부딪쳐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어 아들 샘 워커는 “나중에 알려졌지만 며칠 전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정부에 아버지의 대장 진급을 상신해 놓았더군요. 이렇게 해서 우리 부자간의 한국에서의 첫 만남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행한 TBC-TV와의 6‧25 30주년 기념 다큐먼터리 제작팀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아버지의 급서 후의 맥아더 장군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틀 뒤, 나는 도쿄의 UN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불려갔습니다. 맥아더 사령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워커 대위, 아버님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워커 장군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죽음 은 우리 미군은 물론 미국의 커다란 손실이다. 귀관에게 고 워커 장군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저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것은 안 됩니다. 저는 일선의 보병 중대장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지는 각하는 잘 아십니다. 이 순간에도 제 부하들은 목숨을 건 위험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저를 전선으로 돌려 보내주십시오……”
그때 문을 향해 걸어 나가시던 맥아더 장군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건 명령이야.” 그래서 제가 아버님의 유해를 안고 이곳 알링턴까지 와서 바로 이 자리에 안장을 했습니다. 예상 자유의 불사신이 되어 ‘부전자전’의 주인공했던 것처럼 저는 육군본부로 명령이 나 있었습니다. 저는 맥아더 장군을 이해합니다. 한 전선에서 사랑하는 부하와 그 아들을 한꺼번에 죽게 하기가 싫었을 겁니다.
자유의 불사신이 되어 ‘부전자전’의 주인공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하버드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 28세의 나이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이야기는 더욱 우리를 먹먹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명이 서위렴(徐衛廉)인 미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는 1922년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이 나고 자란 대한 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결의로 미 해군에 자원 입대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해 병역의 의무도 없었지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성경 구절을 따랐다고 한다.
1950년 9월 22일 서울 수복작전 중 녹번리 전투에서 28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윌리엄 해밀턴 쇼는 1922년 6월 5일 선교사로 활동한 아버지 서위렴 1세(William E. Shaw)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서위렴 2세’는 한국 이름이다. 평양 외국인 고등학교를 1939년 졸업한 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1941년 미국에서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를 졸업했다. 미 해군장교로 1943년 입대하고, 2차 대전에 참전하였고 1947년 전역 후 미 군정청 소속 예비역 해군장교 자격 으로 2년간 ‘조선 해안경비대 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 전신)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해사 2기 생도들에게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영어와 함정 운용술 등을 가르쳤고,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대한민국과 해사 생도들에게 교육하여 해군 창군기 발전에 기여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그는 하버드대에서 1950년 철학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그는 미 해군에 재입대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해군 정보장교로 참가 했다. 유창한 한국말과 수도권 지리를 잘 아는 그는 정보장교로 인천상륙작전에 공을 세웠으나 서울 은평구 녹번리 전투에서 1950년 9월 22일 정찰 임무 중 만 28세의 나이로 매복해 있던 북한군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1956년 쇼 대위는 우리 정부로부터 금성 충무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훈장을 추서 받았다. 정긍모, 김석범, 배낙준, 김활란 등 43명이 기금을 모아 1956년 9월 22일 전사자 추모비를 세웠다. 2010년 6월 그의 ‘한국사랑’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시 은평구에 추모 공원과 동상이 건립되었다.
쇼 대위는 부모와 함께 합정동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아래 글은 쇼 대위가 한국전선으로 떠나며 부모에게 보낸 편지 글 한 토막이다.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먼저 돕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평화 시에 선교사로 한국에 간다는 것은 제 양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습니다.” 2014년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외국인”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William Hamilton Shaw) 흉상이 경남 창원 해군사관학교에 건립됐다. 해군사관 학교는 1947~
48년까지 6·25전쟁 이전에 쇼 대위가 사관생도들을 가르치며 우리 해군 창설에 일조하며 근무했던 곳이다.
또 해군은 해군사관 학교 도서관인 통해관 학술정보원에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흉상 제막식”을 이기식 해군사관 학교장(중장) 주관으로 개최하였다. 당시 리사 프란체티(Lisa M. Franchetti) 주한 미해군 사령관(준장)을 비롯한 한·미 해군장병 130여 명이 이날 행사에 참석해 한국에 대한 사랑과 해사에 대한 쇼 대위의 애정을 기렸다. 해군사관학교가 쇼 대위 흉상을 사관생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통해관 학술정보원 1층에 설치한 이유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쇼 대위의 한국에 대한 애국심과 그의 희생정신”을 해군 사관생도들이 본받을 수 있게 위해서이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참전용사 쇼 대위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었던 벤 플리트 장군은 한국전에 참전하여 사단장, 군단장, 8군 사령관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의 아들 지니 벤 플리트 2세도 한국전에 지원하여 B-52폭격기 조종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미 대위는 1952년 4월 4일 새벽 전폭기를 몰고 평남 순천 지역에서 야간 출격 공중전투 중 북한군의 대공포에 전사했다. 지미 대위가 처음 참전을 결심했을 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어머니! 아버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한국전선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이제 저도 힘을 보탤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함께 싸우는 전우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보냈다.
그 편지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한국전 참전 미군 장성의 아들이야기는 그 뿐 아니다. 미 해병 제1항공단장 필드 해리스 장군의 아들 윌리엄 해리스 소령은 중공군 2차 공세 때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미 중앙정보국 알렌 데라스 국장의 아들 데라스2세도 해병 중위로 참전해 머리에 총상을 입고, 평생 상이 용사로 고생하며 살았다. 또 미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 사령관 클라 크 육군 대장의 아들도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 당했다. 이처럼 미군 고위급 지휘관들은 항상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을 기울였고, 개인과 자신의 가족 보다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정신에 충실했다. 바로 ‘노블리제 오블리제’의 귀감이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