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1주년 특집 2 흥남철수 주역 레인 빅토리 호 타고 월남한 양은경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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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때 엄마 등에 업혀 빅토리 호 타고 남하’

어머니, 당신을 기억하며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LA지역의 실향민들이 6.25전쟁 71주년을 앞두고 지난 17일 한국전쟁 당시 북한 지역의 피난민 들을 흥남과 원산을 통해 남쪽으로 무사히 철수시키는데 크게 기여를 한 미군 화물선 SS 레인 빅토리 호(SS Lane Victory)를 방문하는 뜻깊은 행사를 가졌다. 특히 이날 실향민들 중에는 피난 당시 4세로 어머니 손을 잡고 역사적인 빅토리 호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던 양은경 여사(75, 전재미 남가주이북5 도민회중앙회장)가 배의 난간을 잡고서 감개가 무량함을 나타냈다. 양 여사는 “당시 부산항에 도착한 우리 식구, 부모님과 언니, 오빠 그리고 막내 동생은 모두 돌아가셨고 이제는 저와 여동생만 살아 있다” 면서 “부산항에 도착 후 엄청 고달픈 피난살이를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파란만장한 굴곡의 삶을 무소의 뿔처럼 헤치며 살아온 그녀의 한많은 인생스토리와 레인 빅토리호에 얽힌 일화들을 엮어 보았다. <성진 취재부 기자>

레인 빅토리 호 _web한국전쟁에서 1950년 12월 원산에서 부산까지 피난민 7011명을 태우고 내려온 레인 빅토리 호는 나중에 월남전쟁까지 참전했다가 퇴역하여 지금은 선박 역사박물관(Ship Museum)으로 변신해 LA인근 샌 페드로 항구에  정박하면서 관광객들에게 한국전쟁 역사를 알려 주고 있다. “당시 어머니 등에 업혀서 토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말하는 양 여사는 “오늘 딸이 ‘엄마가 타고 왔던 배를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다”면서 “딸에게 이 배를 타고 왔기에 ‘너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고 말했다. 이날 실향민들 앞에서 70여년전 레인 빅토리 호를 타고 내려와 “부산 하꼬방” 시절 고생을 회고 하는 양 여사는 “오늘 이 배에 와서 보니 너무나 감개무량하다”면서 “전쟁통에 누구나 겪은 피난살이 지만 인정은 메마르지 않고 지냈다”고 감사했다. 함경도에서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 양 여사는 모태신앙으로 인정이 많은 핏줄의 가문에 감사 하면서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정감이 깊은 “얼굴은 평범한 여자지만 속은 여장 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북쪽의 여자답게 생활력도 강했다. 한마디로 “왕 또순이”에 “의리”의 여장부이다.

양 여사와 함께 이날 레인 빅토리 호를 방문한 딸은 자랄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은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듣고 자랐다고 했다. 양 여사는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어렵게 모은 재물이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데도 열심이었다. ‘왼손이 하는 일 오른 손이 몰라라’하는 식이다. 양 여사는 이화여고 시절 미모도 뛰어 났지만 스포츠에 남다른 재능으로 탁구 선수로 날렸고, 무용과 피아노에도 뛰어나고 검도까지 영역을 넖였는데, 딱 하나 노래 만큼은 수준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화여자 대학까지 마친 그녀에게 중매 결혼으로 산부인과 남편과 함께 아들과 딸도 부모를 닮아 하바드와 에모리를 다녔을 정도로 영재이다. 양 여사는 어머니의 교훈을 잊지 못한다. “머리에 담아 두는 것은 어느 누구도 훔쳐가지 못한다” 였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지식을 담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명문 경기 여고를 졸업했는데, 99세까지 건강하게 살면서 자녀 교육에 열심이었다. 그 어머니는 임종 때 “내 관에 모교의 교기를 덮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 어머님을 생각할 때마다 양 여사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건강’임을 깊이 새겼다. 건강해야 좋은 일도 많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레인 빅토리 호를 타고 와 새로운 인생 역주”

양 여사는 2000년대에 LA로 이주했는데, 그 이전에는 동부에서 생활했다. 커뮤니티 활동도 왕성했다. LA에서 남가주이북5도민회중앙회장, LA평통 부회장, LA한인회 부회장도 역임했다. 그리고 한때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어려운 원주민들을 위한 봉사로 삶의 의미를 크게 키웠다. 원래 모태신앙으로 품은 크리스찬 정신으로 한국전쟁의 아픔을 이겨내면서 부모님의 알뜰한 훈육을 가슴에 새기며 남편과 함께 양 여사는 열심히 부를 축적했다. 이제는 LA에 16개의 빌딩을 소유할 정도로 재력을 키웠다. 양 여사에게는 “좋은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가 생명의 말씀이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그녀의 바램이다. 그녀의 한 친지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친지는 양 여사와 함께 고국 방문 기회가 있었고 함께 몇일을 지냈다고 한다. 어느 날 시장에 들르게 되었는데 시장 바닥에 떡을 파는 아주머니들을 보더니 “아주머니, 하루 종일 떡을 파는데 고생이 많을 터인데, 하루 얼마를 버나요?”라고 묻고서는 “3만원을 벌어요”라는 대답에 ‘여기 있는 떡을 모두 주세요’라며 하루치 값을 치루는 것을 보고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고 전해 주었다.

▲ 양은경 여사

▲ 양은경 여사

양 여사는  파티에 참석하든가 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에 그 자리에 남겨진 음식 들을 버리게 두지 않고, 투고 박스에 담아 음식을 필요로 하는 주위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음식을 함부로 버리게 두지 않고, 굶주리고 있는 주위 사람에게 나눠준다. 6.25 전쟁통에 겪은 고생과 어려움을 생각하게 되면 음식을 버리게 둘 수 없다는 것이다. 양 여사는 요즘 가끔 인생을 보람 있게 정리 하고픈 생각이 많이 든다고 한다. 지난 70여년의 세월 을 반추하면서 어머님의 교훈을 기억하면서 뜻있는 교육 사업에 재력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녀에게는 6.25가 ‘고난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내일을 준비하라’ 는 모태신앙의 가르침이 있다. 내일을 준비하는 것은 6.25를 잊지 말도록 후세에게 교육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이고 있다. 그래서 남은 인생은 교육사업에 재력을 기증 하고픈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피난민을 구출했던 역사의 선박, 자신의 운명을 태우고 왔던 SS 레인 빅토리 호를 70여년만에 다시 올라 녹슬은 난간을 붙잡으며 양 여사는 먼 하늘 나라에 계신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고 말했다. 70여년전 어머님 등에 업혀 토하기도 했던 그 가물가물한 기억이 어렴풋이 되살아 나면서, 언젠가 어머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머님 말씀 따라 열심히 살았어요”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울먹였다. 진정 그녀 에게 6.25는 ‘잊을 수 없는 고난의 역사’이다.

 ‘고난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내일을 준비하라’

한국전쟁 당시 흥남과 원산 철수작전에서 피난민을 실어 나른 레인 빅토리 호를 포함해 미 병참선 22척 중 19척은 이미 폐선 되고 남아있는 세 척 중 유일하게 승선이 가능해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선박은 산 페드로 항에서 선박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SS 레인 빅토리호다. 또다른 두 척은 샌프란시 스코에, 다른 한 척은 플로리다에 있지만 폐선을 앞두고 있다. SS 레인 빅토리호는 한국전쟁 당시 화물과 병기를 나르던 병참선으로 퇴각하면서 약 7,000여명의 원산 피난민들을 부산으로 실어 날랐다. 그 동안 샌피드로항에 정박되어 미국선주협회가 관리하며 일반인 입장을 허용해 왔지만 팬데믹으로 입장을 제한하여 왔었다. 선박 안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1년이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SS 레인 빅토리호는 샌피드로에서 455피트 길이로 건조된 상선이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1월부터 종전까지 미국은 총 534척을 건조해 미군의 주력 보급함으로 작전에 투입 했는데, 이 배도 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에 출전해 맹활약했다. SS 레인 빅토리호 웹사이트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포위 당한 채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 미 10군단과 한국군 1군단은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 하며 함경도 장진호 일대(개마고원)에서 후방으로 공격작전을 했다. 그 결과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선을 뚫고 흥남 일대로 진출하여 집결하였고, 유엔군은 이른바 흥남·원산 철수작전을 감행했다. 당시 철수작전에 동원된 상선 중 하나가 바로 SS 레인 빅토리호다. 함께 구출활동에 참여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를 지원했다. 이 스토리는 한국영화 ‘국제시장’을 비롯해 함흥철수 관련 영화마다 언제나 등장한다.

역사가 들려주는 당시 상황은 간결했지만 실제 선박 안에서 피란민들이 살아남은 과정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SS 레인 빅토리호의 시설을 설명해주던 자원봉사자 바비 브라운 씨는 선박 난간에 설치된 철제물을 가리키며 “당시 피란민들이 사용했던 화장실”이라고 말했다. 칸막이는 물론 손잡이도 없었다. 선실 안에는 샤워실과 세면대가 설치된 최신 화장실이 곳곳에 있었지만 피란민들에게는 금지된 공간이었다. 상선 선원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는 브라운 씨는 “12월 겨울바다의 바람은 무척 춥고 또 무섭다. 배 안에 탔어도 피란민은 차별 아닌 차별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면 선박의 이름도 차별의 역사와 연결된다. 선박 이름인 레인은 1882년 테네시주 잭슨에 흑인 청년 고등학교로 설립된 레인 칼리지(Lane College) 설립자인 미국 유색 감리교 성공회 주교인 아이작 레인 목사의 이름이다. 그 학교는 나중 일류 문과 대학으로 성장했다. 인종차별을 딛고 교육 을 시켰던 흑인 교육자이자 목회자의 이름을 딴 배가 한국 피란민들을 구출한 기적의 역사를 남겼다는 게 놀랍다. 한국전 참전을 끝낸 SS 레인 빅토리호는 1953년 10월 가주 수산만(Suisun Bay)으로 돌아왔다가 1966년 베트남 전쟁에 다시 참전해 탄약과 보급품을 옮기는 일을 맡았다. 1970년 국방부 예비 함대에 편입됐으나 제2차 세계대전 미국 상선 참전용사회(US MMVWWII) 자원봉사자들이 SS 레인 빅토리호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연방 정부에 요청, 결국 1990년 에 샌 페드로 항구에 배치됐다.

 ‘원산에서 부산까지 약 7천명 피난민 구출’

3731681140_1Ww8nNvp_3이날 재미 남가주 이북 5도민중앙회(회장 변무성)가 한국전쟁 71주년을 기념해 샌페드로 항에 있는 SS 레인 빅토리호를 방문은 많은 실향민과 가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었다. 이날 변무성 회장이 2세로서 처음으로 LA 재미 남가주 1천만 이산가족 위원회 회장에도 선임돼 SS 레인 빅토리호 방문 한자리에서 이취임식 기념행사도 함께 열렸다. 이날 변무성 회장은 미주선박 협회 측을 대리한 박용주씨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국민의례로 시작된 이.취임식 행사는 김영구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됐는데, 이날 약 80명의 실향민과 가족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조선환 이사장은 인사 및 연혁보고에서 “해외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2009년에 LA를 비롯해 뉴욕, 워싱턴DC, 시카고 등 4개 지회를 설립해 미국정부와 상봉사업 을 추진하고 있다” 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변무성 신임회장은 “실향민 자녀인 2세대들이 실향민 1세대를 위해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부모 세대 애환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변 회장은 “이제 71년의 세월을 넘어 일천만 할아 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대부분이 이산상봉의 뜻을 이루지 못한채 역사 속으로 떠나갔다” 면서 “그 이루지 못한 뜻을 원망의 언저리 에 던저버린 이산가족 상봉의 숙원사업을 우리 2세와 3세들 이 이어 받아 역사 속에 간직하고 잊지 말고 이루어 나가자”고 호소했다.

이어 이임하는 황경찬 전임회장은 “지난 몇 년간 한국 미국 북한의 정치적 변화와 코비드 19로 인하여 이산가족상봉이 더 이상 진전이 없어 아쉽다”면서 “오늘 패기 넘친 2세 변무성 회장이 취임하게 되어 마음 든든하며, 여러분 모두가 신임 회장을 도와주기 부탁한다”고 말했다. 이날 박경재 LA총영사는 이종돈 영사가 대독한 축사에서 “오늘 남가주이북5도민회의 레인 빅토리 호 방문과 일천만이사가족위원회장 이위임식이 회원 여러분들의 화합과 단결로 좋은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철홍 이북5도민회중앙회 상임고문은 “민족의 염원인 자유통일을 이룩하기위해 조속한 기일내 재미이산가족들의 권익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재미 남가주 이북5도 중앙회는 황해도, 평안북도, 평안남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5개도 출신 실향민과 2세들 모임 단체로, 현재 회원은 남가주 지역을 중심으로 700~800명에 이른다. 임원진들도 이사장과 상임고문을 제외하고 모두 2세대로 올해 창립 32주년을 맞이하며 어느덧 차세대로 전환 중이다.한국전쟁이 끝난 후 1,000만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산가족 재회를 염원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애환을 간직한 채 사망해 이제 10만 명도 채 남지 않았고, 미 전역에는 1,000명 정도의 한인 실향민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문의: 변무성 회장 (909)22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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