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언론인 임춘훈 시사칼럼] 한동훈이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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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영부인을 면담한 적이 있습니다. 모종의 일로 이희호여사가 보고싶다고 해 아득한 태평양 2만 리 바닷길을 날아 청와대 영부인 집무실에서 여사를 만났습니다. 15대 대통령 선거 무렵 동교동 자택에서 면담한 지 3~4년 만에 뵙는 것이라 별 생각 없이, 마침 그때는 김영란 법 같은 귀찮은(?) 법도 없던 때라, 작은 선물 하나를 준비해갔습니다. LA 다운타운 7가에 밀집해있는 보석상가에서 구입한 500달러 짜리 목거리였습니다. 30여 분의 편안한 면담을 끝내고 일어서는데 영부인의 얼굴이 순간 불편한 기색으로 변했습니다. 탁자 위에 놓인 목걸이 선물에 이여사의 시선이 머물면서 분위기가 ‘갑분싸 ̓<갑자기 분위기 싸~> 모드로 바뀌었습니다. 비싸지 않은 작은 선물이라고 설명을 드렸지만 이희호여사는 단호했습니다. 비싸건 싸건 대통령부부는 관련 규칙-규정에 따라 어떤 선물도 받아선 안 된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영부인은 내가 무안해 할까봐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춰 선물을 거절하면서도 뜻은 완강했습니다. 결국 드릴 선물은 못 드리고 ‘염치없게도̓ 영부인이 주는 선물, 청와대시계 한 세트를 받아들고 나왔습니다. 덕분에 내 아내는 팔자에 없던 그 ‘영부인 목걸이̓로 지금까지 호강(?)하고 있습니다.

김건희여사가 최재영이라는 재미 ‘유령 목사’를 자신의 사무실에서 만난 건 윤석열대통령 취임 후 4~5개월 정도 되던 무렵입니다. 비서실 의전팀에서 ‘선물수수 절대 불가’ 규칙을 영부인에게 충분히 고지(告知)한 뒤였습니다. 헌데 김 여사는 “뭘 이런 걸–”하며 300만 원짜리 디올 백을 덥썩 받았습니다. 성경이사야서에나 나올법한 이 ‘사탄 목사’는 손목시계 속에 감춘 고성능 몰카로 대통령 부인의 영낙없는 뇌물수수 현장을 생생히 촬영했습니다. 최재영은 대통령 선거 전후에 있었던 김건희와의 첫 면담에서도 샤넬 화장품과 향수 등 고가의 선물을 줬다고 폭로했지만 이 장면은 몰카에 담지 못해 진위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대통령실과 친윤(親尹)여당 쪽에서는 영부인의 디올 백 스캔들로 국민여론이 싸늘해지자 “좌파유튜브 매체와 친북 목사가 합작한 함정 몰카 공작”이라 역공을 폈습니다. 영부인 김건희의 사과 요구엔 “피해자가 뭔 사과냐”고 발끈하다가 여론이 점점 더 악화되자 “대통령부부에게 온 선물은 개인이 수취하는 게 아니라 관련규정에 따라 국가에 귀속, 관리 보관한다”라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김건희여사가 디올 백을 소유하거나 사용한 적이 없는데 왜 뇌물혐의로 비난을 받아야 하느냐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변명입니다.

2006년 노무현대통령부부가 박연차 태광회장에게서 생일선물로 받았다는 시가 2억 원짜리 이른바 ‘논두렁시계’의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대통령이 대노(大怒)해 뇌물로 피아제시계 2개 한쌍을 받은 부인 권양숙여사를 꾸짖고 시계를 논두렁에 내다버렸다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전해지자 노빠 지지자들은 “그러면 그렇지”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시계는 논두렁에서 찾아내 줄행랑을 친 억세게 재수좋은 어떤 놈의 소유가 됐으니 우리 노통(盧統)과는 무관하다–. 노빠진영의 논리가 그렇게 맹랑했습니다. 2024년 용산대통령실에서 일어난 디올 백 사건의 완벽한 데자뷔(deza vu 旣視感)입니다. 아니 그 반대 자메뷔(jamais vu 未視感)일 수도 있습니다. 희한한 일이 지난 4~5일 사이 한국 정치권, 용산대통령실을 포함한 범여권 전체를 뒤 흔들었습니다. 87년 체제 이후 이런 미스터리한 정치적 사건이 권부(權府)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건 처음입니다. 발단은 역시 김건희 영부인의 해괴망칙한 명품 백 사건입니다. 여론이 악화되고, 이 문제 해결없이는 4월 총선, 특히 전체의석의 절반 가까이 되는 수도권에서의 참패가 불가피하다는 집권당 내부 목소리가 커지면서, 총선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전의(戰意)를 불태우던 국민의 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눙치듯 역린(逆麟)을 슬쩍 건드리고 나섰습니다. “영부인 문제는 국민 눈높이에서 해결해야–”

별 대수롭지도 않은 원론적 발언인데 “국민 눈높이 아닌 영부인 눈높이”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여사님의 영원한 수호천사 대통령이 이번에도 참지 못하고 나섰습니다. 이어 비서실장 이관섭, 대통령 보디가드 출신 이용의원 등 친윤 무뇌(無腦) 행동대원들이 분기탱천 일어섰습니다. 이관섭비서실장은 한동훈을 찾아가 “비대위원장직을 내 놓으라” 겁박하는가 하면 이용은 “윤대통령이 한동훈위원장에 대한 지지와 신뢰를 철회했다”고 천기누설성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윤통이 한동훈의 배신에 극대노(極大怒)했다더라”는 따위의 출처불명의 ‘용산 괴담’이 하루 이틀 새 함박눈 퍼붓는 여의도를 휘덮었습니다. 부인문제를 누군가가 건드리면 거의 정신줄을 놓는다는 윤석열대통령의 ‘버럭’이 참모들 면전에서 폭발했습니다. 이런때 대통령을 도와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참모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비서실장, 정책실장, 정무수석, 홍보수석 등이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화를 낸다고 비서실장이 여당대표한테 쪼르르 달려가 물러나라 겁박을 한다? 이런 우두망찰 비서실장 서슬퍼런 전두환 때도 없었습니다.

이번 일련의 사건은 왜 취임 1년 반을 넘긴 대통령이 아직도 60%의 절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못 받는 헌정사 최초의 ‘극(極) 비호감 대통령’이 됐는지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해 줍니다. 바로 대통령의 인사실패입니다. 입찬소리-듣기 싫은 소리 안하는 모범생 같은 직업관료 위주로 용산과 내각의 중요 포스트가 채워졌습니다. 핵심 참모들은 무능-나태한데 반해 영부인은 사사건건 똑 소리를 내는데다 바지런하기까지 해 사고 연발-사고 다발(多發)입니다. 윤석열정부가 출범 1년 반을 허우적대는 단초(端初)의 한 자락입니다. 영부인 문제가 촉발한 윤석열대통령과 한동훈 국힘 비대위원장의 갈등은 엊그제 두 사람의 전격 만남으로 일단 파국은 피했습니다. 한동훈은 “뒤끝이 장난이 아니라는” 대통령의 심기를 달래려 “평생 간직하고 있던 존경과 신뢰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그 답지 않은 ‘尹비어천가’까지 읊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의 갈등이 언젠가는 다시 폭발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특히 민주당 등 야권에서는 한동훈이 윤석열에 의해 조만간 ‘팽’ 당할 것으로 점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한동훈이 없어져야 총선, 더 나아가 27년 봄 대선 때까지, 자기들에 유리한 정치상황이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섞인 기대 때문입니다.

이번 윤-한 갈등은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충돌이라는, 투키디데스 함정의 여의도 버전 성격이 짙습니다. 윤대통령은 여당인 국민의 힘에 뿌리가 별로 없습니다. 원조 윤핵관인 이철규 당 인재영입위원장을 통해 당 장악력을 높이면서 총선 후보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비대위장 취임 한 달 만에 당을 거의 장악하고 자신과는 비교가 안 되는 대중적 인기와 지지를 끌어모은 한동훈이 윤석열로서는 여러모로 불편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지금 전황은 일단 한동훈에 유리합니다. 윤이 한을 무리해서 내치면 이후 윤에 닥칠 정치적 상황은 거의 악몽수준-재앙수준입니다. 총선 참패, 야당 발 탄핵 공세, 차기정권 재창출 실패,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는 전직 대통령 신세–. 법률전문가인 윤대통령으로서는 한동훈을 무리해서 내쫒았을 때 예상되는 이런 악몽의 시나리오가 쉽게 떠올려질 겁니다. 한동훈이 이겼습니다. 이길 수 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평생 이기기만 하는 삶을 살아 온 윤석열은 지는, 져주는 연습을 지금부터 해야합니다. 애처(愛妻) 김건희 문제에서부터 지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그 길만이 나라도 살고 자신도 사는 길입니다.
[임춘훈 2024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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